궁궐인가, 사찰인가…양주 회암사지(址)와 아픔 가린 선각왕사 모조비
궁궐인가, 사찰인가…양주 회암사지(址)와 아픔 가린 선각왕사 모조비
  • 신상인 기자
  • 승인 2017.12.1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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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즈 신상인 기자]

▲ 회암사지(사적 제128호) ⓒ사진 = 현스 문화유산답사기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檜巖寺)가 실체를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난 2000년 지표 조사를 하던 박물관 발굴단원이 발견한 글자가 새겨진 청동유물이 시작이었다.

天寶山中 檜岩寺 普光明殿 四校角… 縣琴鐸… (천보산중 회암사 보광명전 사교각~ 현금탁~) 즉, '천보산 중턱의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에 달린 금탁'으로 시작된 청동기에 새겨진 134자의 명문은 한 공덕주의 발원문(發願文)으로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었던 것이다.

또한 금탁 상단부에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ㆍ무학대사)'와 '朝鮮國王(이성계)', '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 씨)', '世子(이방석)' 등의 명문이 새겨 있었다.

결국 이를 통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새로이 나라를 건국하고 3년만인 1394년에 국찰인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이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밝혀냈다.

하지만 신덕왕후 강 씨와 그의 아들인 방석과 방번 형제는 이방원(후 태종으로 조선의 3대 왕이 됨)에게 죽임을 당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방원은 이들이 눈엣가시였다.

발굴지에서는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되는 것을 보면 이를 방증한다.

특히 동자상은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다. 누군가가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이 내던졌다는 뜻이다.

▲ 회암사 동쪽 능선상에 삼조사(三祖師) 부도. 지공선사,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여러 부도가 남북 일렬로 배치돼 있다. 각 탑은 탑비와 석등을 함께 구성하고 있다. ⓒ사진 = 현스 문화유산답사기

國刹 회암사는 왜 무너졌는가

회암사는 창건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인도승려 지공선사(指空禪師), 그의 제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공선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 나란다사(아라난타사ㆍ阿羅難陀寺)의 마지막 졸업생으로 마다가국 만왕의 왕자로 태어나 나란다사에서 율현에게 수학한 뒤 스리랑카의 보명존자에게 득도한 명망있는 승려였다.

지공선사는 원(元)나라를 거쳐 1326(고려 충숙왕 17)년 3월부터 2년 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당시 고려 백성들은 "석존(釋尊)이 다시 태어나 이곳에 도착하셨으니 어찌 뵙지 않겠는가"라며 '석가의 환생'이라고 추앙했다.

이어 1357년 지공선사는 나옹선사에게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ㆍ삼각산의 뿌리를 안산으로,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는 수기(手記)를 주었다.

고려말 이색의 <목은집> 중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를 보면 건물 266칸과 15척의 불상 7구 외에 10척의 관음상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아울러 회암사는 '방장'보다 '정청'을 더 중요시 여겼다. '정청'을 가운데 두고 좌ㆍ우에 방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회암사에서 화려한 행사를 펼친 공양왕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머물던 곳이 바로 청기와를 두른 '정청'이었던 것이다. 사찰의 큰스님이 '방장'에 기거하면서 왕의 거처인 '정청'을 직접 보살폈던 것이다.

이후 지공선사, 나옹화상에서 조선의 무학대사(無學大師)까지 삼대 승려가 수행한 사찰로서 왕실과도 연관을 갖는 당대 최대 사찰이었음을 절터의 규모로 알 수 있다.

▲ 조선 왕실이 회암사의 불사를 후원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금탁. ⓒ사진 = 현스 문화유산답사기

그러나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번창했던 국찰이었던 회암사가 성리한에 기반한 정책을 이유로 유생들의 아우성 결과, 절은 불태워지고 세월의 변화 앞에서 400여년 만에 쓸쓸한 절터만이 전부인 이유가 옛이야기처럼 전해진다.

1419년(세종 1년) 회암사 스님들의 간음과 절도사건으로 상왕(태종)의 철퇴 명령이 떨어지면서 1차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이성계의 거처이기도 했지만 정적(政敵)에 대한 감정과 불란의 요소가 고스란히 가지고 잇는 곳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과 등을 돌린 곳이기도 하고,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이 머문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434년(세종 16년) 이래 회암사에 대한 대대적인 중수와 불교의 폐단을 비난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른다.

회암사 중들이 불사를 화려하게 치렀다든가, 종실과 비빈이 이를 비호했다는 삼사(三司)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회암사는 당시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승려수가 무려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생들이 난리를 쳐도 끄떡없던던 회암사에 승려들의 추행이 잇달아 드러나면서 큰 문젯거리가 됐다. 추행의 대상은 왕실 및 고급관료들의 부인과 그들을 수행한 여종들로 사실여부를 떠나 금욕의 공간이면서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이기도 사찰의 특성은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태종의 철퇴는 이유가 충분했다. 잠시 쇄락을 금치 못하던 시기 이후 1472년(성종 3년)에 세조(世祖)의 정희왕후(당시 대왕대비)가 다시 중건케 했다. 이어 부침을 거듭했던 회암사는 명종 당시 문정왕후가 실권을 잡고 보우를 등용하면서 또 다시 전성기로 접어드는듯 했지만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표현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해 1565년(명종 20년) 대규모 불교 행사를 준비하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도 끝내 맞아 죽고 만다. 

다만 요승(妖僧)이었던 보우는 최근 학계 일각에서 품격 높은 시문을 바탕으로 불교의 전통을 유지ㆍ발전시키기 위해 애쓴 고승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다시 1828년(순조 28년)에 지공ㆍ나옹ㆍ무학 등 세 승려의 부도와 비(碑)를 중수하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게 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고려말 나옹(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한 선각왕사비(보물 제 387호)와 화재로 파손된 비를 대신해 모조비(앞)를 세웠다. ⓒ사진 = 현스 문화유산답사기

1922년 봉선사 주지 홍월초화상이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과 나옹, 무학의 세 스님의 진영을 모셨다.

주요 문화재로는 나옹화상의 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ㆍ보물 제387호), 무학대사 승탑(僧塔ㆍ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ㆍ보물 제389호)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지공선사 승탑, 나옹선사 승탑, 무학대사비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본래의 회암사 절터인 회암사지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됐다.

태조가 왕사로 책봉하고 묘엄존자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한 무학대사의 탑은 조선전기 승탑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비문은 태종 10년 변계량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의 글씨로 세워졌으나, 1821년에 비가 인위적으로 파괴돼 1828년에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새로 지어진 회암사에서 관음전과 삼성각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볼 수 있는 선각왕사비는 1997년 3월 성묘객의 부주의로 인한 화재로 보호각과 함께 전소됐다.

그래서 1999년 양주시에서 새로 세운 모조비 뒤에 옛 비석의 귀부만 있다. 마치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로 웅크리고 있는 듯한 참담한 모습은 400년 전 유생들의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다행히도 화재로 심하게 파손된 비석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하여 보관하고 있다니 그나마 안심이다.

담당업무 : 경제·산업부
좌우명 : 사실(Fact)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제대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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