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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혐한과 반일의 감정…합리적ㆍ윤리적 생각하는 중간 공간을 넓혀보고 싶다”박유하 세종대 교수
김종영 사람과사회 기자  |  weeklypeo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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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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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즈】김종영 사람과사회 기자

이 글은 계간 ‘사람과사회(봄, 2017)’와 ‘사람과사회’ 홈페이지(www.peopleciety.com)에 함께 올린 글을 기사제휴에 의해 ‘데일리즈’에도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자발적 매춘부’라고 했다는 게 큰 비판의 포인트인데,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렇게 쓴 적이 없다. 일본 우파를 비판할 때 ‘그들의 생각’을 가져와서 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지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하고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모두 매춘 차별이 있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 이상으로 일본에서 학계를 비롯한 여러 곳에 큰 파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갑론을박을 이어가면서 그 중심에 박유하 세종대학교 교수가 있다.

지난 1월 형사1심 판결을 앞둔 지난 1월 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근처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제국의 위안부>에 담고 싶었던 것과 말하고 싶은 입장이나 주장을 직접 듣고 싶었다. 그의 입장을 지면에 담고 싶은 마음도 한 몫 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하늘의 별을 잃어버린 시대처럼 공공의 영역, 공론의 장을 잃어버린 시대 같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다음은 박 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마녀사냥’에서 ‘사람사냥’으로…박유하를 말하다

- 책과 관련한 위안부 논란은 『제국의 위안부』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2005년 『화해를 위해서』라는 책을 썼다. 일본과 한국에서 일정한 평가를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이 되기도 했다. 2006년 말 번역이 됐는데 일본에서는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출간 이후 일본 진보 지식인 사이에서 평가가 나뉘었다. 지금의 우리처럼 10년 전에 이미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일각에서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책이 상을 받으면서 반발이 더 커졌다. 한국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활동을 했던 재일교포 연구자를 필두로 반론 내지 비판론이 일부 나왔지만 극히 소수였다. 일본 지원단체장이나 같은 연구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어서 특별히 반론을 하지는 않았었다. 다른 책을 보내주는 정도였고, 그것으로 나의 생각을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화해를 위해서> 저변(底邊)에는 전후 일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위안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이 있고, 그것이 달랐던 점과 신문 서평이나 수상 등으로 일본 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에 대해 경계를 한 것 같다.

   
▲ 위안부 소녀상 ⓒ출처 = 계간지 '사람과사회' 2017년 봄호

- 일본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의 우파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운동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양쪽이 다 잘 받아들여진 것 같다. 기본 핵심은 <제국의 위안부>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기존 운동가나 지식인들은 내가 그들과는 다른 자료와 논리로 우파를 비판했고 일부에서 반성을 이끌어낸 것은 무시하고 자신들을 향한 비판에 대해서만 반발했다.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10여 년 동안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다. 1991년에 위안부 문제가 시작(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됐다. 사실 한국 이상으로 일본에서 학계를 비롯한 여러 곳에 큰 파장을 미쳤다. 왜냐면 일본 패전 이후 헌법과 기본교육법 등을 새로 만들면서 과거 전제주의 국가와 다른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며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제주의 과거와) 단절해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끝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면서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양심적인 지식인 등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반성적인 담론이다.

그러면서 무라야마 담화(‘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아’라는 제목의 담화), 여성을위한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를 온건과 급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됐다. 나중에는 민족과 성(Gender) 사이의 갈등도 보인다.

1997년 무렵, 서경식 교수와 우에노 치즈코(<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저자) 선생 사이에 이미 대립이 있었다.

내가 재일교포 사회의 가부장제 문제를 여성주의 시각에서 비판하기 시작한 때가 2000년대 초다. 이 무렵부터 서경식 교수 등이 반발을 하기 시작했고, <화해를 위해서>가 나오면서 표면화됐다. 그리고 2007년 봄에 일본에서 서평회(書評會)를 할 때 토론자로 나온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저자)가 해준 말이 있다. 서평 모임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정대협 활동을 한 바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 위안부 문제가 <화해를 위해서>를 전후로 지식인 사이에서 관심과 논란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뜻밖에 <화해를 위해서>로 상을 받게 됐다. 수상 소식을 들은 게 2007년 겨울이고, 2008년에 시상식이 있었다. 그해 가을 즈음에 서경식 교수가 나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는데, 한겨레에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2008.09.12.)’이라는 글(이 글과 거의 같은 맥락의 글은 <언어의 감옥에서-어느 재일 조선인의 초상>(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돌베개, 2011.03, 322~364쪽)에 수록한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으며, 박 교수는 ‘박유하 <화해를 위해서>를 둘러싼 ‘논쟁’을 돌아보다 (2)’에서 서 교수의 글을 반박함)이다.

서 교수의 글은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비판하면서 ‘박유하를 지지하는 일본이 문제’라는 내용이 논조의 중심이다. 이때부터 오늘까지 이르는 심각한 문제들이 본격화했다고 본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방금 아시아여성기금을 둘러싸고 반발했다고 말했는데, 그러한 반발, 이는 또는 운동방식ㆍ인식ㆍ사상일 수도 있는데, 그러한 차이를 차이로 두지 않고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쪽으로 갖고 갔다.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가 나오기 이전에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담론과 운동의 대립이 있었던 10여 년의 전사(前事)가 있었고, 『화해를 위해서』가 나온 후로 1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됐다는 것은 서경식 교수의 글에 문제가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서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 당시, 나는 일본학이나 문학 분야에서 활동을 했지만, 이른바 진보 담론 안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고 책이 특별히 주목 받은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특별히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한겨레에 그런 비판이 나타났다.

서 교수가 비판한 사람들은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비판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불신을 심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대를 넘어 정영환 교수 같은 이가 지금까지 같은 얘기를 이어서 하고 있다. 최근에 그들은 와다 하루키 교수며 우에노 치즈코 교수를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말하자면 현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가 나오기 이전에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담론과 운동의 대립이라는 10여 년 동안의 전사(前事)가 있었고, <화해를 위해서>가 나온 후로 1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 책이 일본에서 주목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화해를 위해서>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몇 사람이 반발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7년 후 한국에서는 고발을 당했다. 10년 전 서 교수 등의 비판 때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고 있다.

- 한겨레에서 <화해를 위해서>와 관련해 비판적인 기사를 쓴 적이 있다고 들었다.

재일교포 역사가인 윤건차 교수의 책(<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창비, 2009.07)이 번역본으로 나왔을 때다. 이 책은 한 장(章)을 할애해 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승동 한겨레 기자가 윤 교수와 책을 소개하는 인터뷰 기사(2009.07.24)에서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소개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일본 우파 지식인의 찬사를 받은’이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부터 이른바 진보들의 문제적인 부분이 드러났다고 본다.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에서 찬사를 받은 것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다. 아사히는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적 신문이다. 일본에서 나를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은 상을 준 곳이 가장 높이 평가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해설도 우에노 치즈코 선생이 썼다.

그런데도 (한겨레에서) 일본 보수 찬사 등을 언급하며 기사를 쓴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찬사 관련 이야기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 한 기자에게 물었다. 한 기자는 재일교포 두 사람에게 듣고 쓴 것이라며, ‘소스’(취재원)를 알고 싶다면 연락해서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누구의 말을 들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자 한 기자는 두 사람 중 서경식 교수는 연락이 되지 않고, 윤건차 교수에게 답장을 받았는데, 어느 대학 교수의 블로그 글을 보고 해준 말이었다고 대답을 받았다고 내게 말을 해줬다. 블로그 글은 중요한 게 아니었고, 심지어 찬사라는 말도 없었으며, 그저 흥미롭게 봤다는 정도의 표현만 있었다. 당시에 주고받은 메일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이야기를 좀 길게 한 이유는, 한겨레신문은 어떤 사람이 일본 보수 우익의 상찬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런 거짓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엔 한 기자에게 사과만 받고 끝냈다. 그 이후 인터넷 신문 기사는 조금 고친 내용을 올려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 자신이 쓴 <제국의 위안부>를 들고 있는 박유하 세종대학교 교수 ⓒ사진 = 박진영

-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

몇 년이 흘렀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다. 서경식 교수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는 책이 됐고 김대중학술상을 수상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런데, 고발을 당하면서 고발장에 서경식 교수나 나를 비판하던 사람이 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국의 위안부>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아주 오래된 것인데, 지식인들이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다. 다른 하나는 (조금 전 설명한 바와 같이) 사실(fact)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다.”

- 그렇다면 고발을 한 시점으로부터 부정적 인식이 빠르게 나빠졌다고 판단해도 되나?

그렇다. 출간 직후에는 긍정적인 서평이 많았다. 그러나 고발장에는 ‘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는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식의 틀을 씌워놓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한국 진보 시민들이 갖게 됐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2007년 초기에 이미 정대협은 나를 가리켜 ‘지일파(知日派)’라고 썼던 프레시안 기사를 보고 지일파를 ‘친일파(親日派)’라고 왜곡ㆍ번역해서 전달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제국의 위안부>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아주 오래된 것인데, 지식인들이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의 차이다. 다른 하나는 (조금 전 설명한 바와 같이) 사실(fact)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다. 그 비판은 일본에서 평가를 받으면서 더 강해졌고, 이는 그들의 운동을 방해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는 기존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됐다고 본다.

- 고발은 어떤 의미로 보나?

고발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고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최종 진술에 조금 썼는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2013년 『제국의 위안부』를 낸 후 할머니를 만나기 시작했고, 친밀하게 교류한 할머니(故 배춘희 할머니, 2014년 6월 8일 별세)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의 위안부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와 ‘운동에 대한 생각’ 등이다. 이 두 가지는 책에서 분석한 것과 놀라울 만큼 같았다. 그래서 다음 해인 2014년 4월 2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안부를 위한 제3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열어 이런 분들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심포지엄은 책에 공감하는 분들과 일본학자, 언론인 등이 참여했는데 한일 양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대해 지원 단체는 위기의식을 가진 것 같다. (위기의식 관련 내용은) 고발장에도 적혀 있다. 박유하가 <화해를 위해서>를 냈는데, 이번에 <제국의 위안부>를 또 내고 심포지엄까지 했고, 그대로 놔두면 위안부 문제 해결이 해악이 된다는 내용이다.

할머니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아 많은 분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우연히 만난 할머니들은 내가 예상했던 말씀들을 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눔의집은 나의 방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심포지엄 후에 나눔의집을 방문했을 때는 거부하는 일도 겪었다. 그 때 법적으로 대응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친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고발을 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이라 생각한다. 그 분이 살아계셨다면 아마 쉽게 (고발을) 진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발을 당하고 생각한 게 있다. 고발을 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다.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떠올랐다. 이 교수는 2004년 9월 TV토론에 출연해 위안부 관련 발언 때문에 정대협의 공격을 받고 나눔의집에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정대협이 이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고 사직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발은 그런 폭력의 일환이라고 본다.

과거의 운동 단체와 (틀린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했다가 무사한 사람이 없었다. 쉽게 고소ㆍ고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억압의 표현이었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책임을 부정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쉽게 고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서는 ‘운동의 경박성(輕薄性)’이라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다.

- 학생들이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2013년 8월 책을 내고 9월 즈음부터 할머니들을 만나려 준비한 후 10, 11월부터 만나기 시작했다. 고발을 하기 위해 2014년 1학기 즈음에 책을 분석했을 것으로 안다. 책을 분석한 사람은 한양대 로스쿨 학생들이다. 물론 어른도 있었겠지만, 대학원생이므로 학생이다. 분석을 하는 과정에는 교수의 지도도 있고 방향도 설정해 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처음에 100여 곳 이상 지적을 했다가 내가 반박문을 내자 다시 반으로 간추렸다. 100여 곳 이상 골라냈다는 것은 학생들이라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상식 수준밖에 몰랐던 것과 텍스트 분석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독해 자체를 제대로 못한 결과로 본다. 정대협에 대해 비판한 곳도 다수 들어 있었다.

   
▲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저, 2013년 8월 ⓒ 뿌리와이파리

고발장에 보면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이나 일본군의 협력자로 매도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잊고 스스로 피해자라고만 주장하면서 한일 간 역사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기술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내가 비판한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니라 지원 단체다. 매춘이라는 단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단순히 매춘부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을 비판한 부분에서 쓴 것이다. 그런데도 나눔의집 소장과 박선아 고문 변호사 등 주변인들은 이런 문맥을 왜곡해서 전달해 사회적 지탄을 받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첫 고발장에서 내 책이 허위라고 비난했지만 나중에 고발 취지를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 ‘해결 방식이 옳지 않다’는 식으로 바꾸었다. 고발장은 또 일본의 위안부 문제 ‘부정파’를 비판한 책이었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위안부 할머니를 비판한 책인 것처럼 호도했다. 도중에 고발 취지를 바꾼 것은 고발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비판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앞에서 지식인의 시각 차이와 기존의 비판이라고 했는데, 이 외에 제대로 읽지 않은 것과 일방주의적인 감정도 한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를 비롯해 하고 싶은 여러 이야기를 간추려서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주면 좋겠다.

단적으로 말하면, 책을 통해 시도한 것은, 20년 이상 운동 단체가 하고 있는 주장, 즉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끌려간 소녀’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목소리를 낸 할머니는 200여 명이다. 그 중에 사람들 앞에 나선 분은 일부다. 나서지 않는 분도 많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런 분들의 목소리도 대변하고자 했다.

보통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피해자를 무시했다거나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거꾸로다. 당사자의 숫자는 많고 여러 경험을 했다. 또 30년대, 40년대 등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소수의 무구한 어린 소녀가 위안부 전체를 대표했다는 것만 강조하는데, 이는 결국 ‘그렇지 않은 경우의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우리 안에 있는 매춘 차별이나 그와 같은 인식의 결과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게 만든 건 우리의 가부장제적 인식이다.

‘자발적 매춘부’라고 했다는 게 큰 비판의 포인트인데,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렇게 쓴 적이 없다. 일본 우파를 비판할 때 ‘그들의 생각’을 가져와서 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지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하고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모두 매춘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이들 양쪽은 모두 여성들을 차별하고 배제해왔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설령 자발적으로 갔다고 해도 가부장제의 희생 하에 아버지나 오빠, 어머니를 위해 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도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강제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사람도 많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성들은 이에 대해 ‘지켜주지 못했다’는 담론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 담론은 차별을 내포한 것이다. 지켜주지 못했다고 우는 사람이나 감춰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근본적인 인식은 맞닿아 있다. 더 애석한 것은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조차도 이런 담론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논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식의 차이라고 보는데, 비판을 하려는 지식인이라면 계속 진전을 이뤄가야 학문의 발전도 이룰 수 있다.

- 전체와 부분의 시각으로 보면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고 고발장에서 문제 삼고 있는 내용은 특정 낱말이나 문장을 중심으로 한 게 대부분이다. 왜곡과 비판을 낳는 원인이라고 본다. 문맥을 무시하고 부분으로 전체를 왜곡하기 때문에 논란이 쉽게 끝나지 않는 것 같다.

논란이 이어지는 최대의 이유는 나눔의집이 고발을 하면서 ‘박유하가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했다’는 틀을 만들어 보도자료 등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모두 비난을 하게 됐다. ‘해방 후 70년’을 ‘위안부 할머니의 나이’로 읽는 등 웃지 못 할 오독이 많았다. 그러나 재판부도, 학자도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 사회적 현상으로 위안부 논란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크게 보면, 앞에서 20여 년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탈냉전시대(Post–Cold War Era)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진보좌파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붕괴 등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겪었다. 그러다 보니 더 강렬하게 기존의 가치관을 이어갈 필요가 있었다.

1990년대는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강화되었다. 문제는 정체성이나 정치적 스탠스(Stance, 어떤 사안이나 현상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안을 두고 똑같은 생각만 한다.

진보의 입장에서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파와는 내전을 거친 사이여서 갈등이 더 깊다. 불신과 대립을 거치면서 지적 태만 현상이 일어났다. 자성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검증하지도 않는다. 보수에 대한 대립적 생각이 진보 안의 차이에 대한 두려움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박유하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다’,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인용(Wording)을 잘못한 것이다. ‘법적 책임을 지우기는 어렵다’는 표현이 정확하며 내가 한 말이다. 이와 유사한 것은 무척 많다.

강제연행은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초기에는 강제연행으로 믿고 법적 책임과 국가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보니 인신매매가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요구사항도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위안부 실상에서 인식의 진전이 있었다는 점을 한 번도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증언집(證言集)에 내용이 모두 있다고 하지만 증언집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다.

“혐한과 반일의 감정은 점차 커졌다. 그러다보니 중간 지점,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하는, 합리적이면서 윤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런 중간 공간을 넓혀보고 싶었다.”

- 일반 국민이 알고 있는 현실과 다른 사실이 있는데, 이를 드러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왜곡이 계속 이어졌다는 뜻인가?

그렇다.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올 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잘 모르는 사람은 강제로 연행했다고 대답할 것이고, 조금 더 아는 사람은 인신매매 업자가 많았고 이는 총독부가 시켜서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이해를 그대로 놔둔 것은 지원 단체의 책임이라고 본다. 시간이 흐르고 연구가 진전되면 바뀌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커다란 틀이 바뀐 것인데도 말하지 않았다.

최근에 정대협이 이 같은 상황을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랐다. 그런 기만을 상대가 일본이라고 해서 기만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10년 전에 이런 문제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이 커지기 전에 자성과 그에 기반을 둔 해결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미군 위안부나 한국의 월남 문제가 일본에서는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자신의 문제도 반성하면서 일본에게 물을 것을 제대로 묻자는 게 나의 취지이자 입장이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왜곡했다.

- 일본 국회가 군무원(軍務員), 즉 군속(軍屬)으로 인정하려 한 적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제대로 정확하게 책임을 묻는 과정이다. <제국의 위안부> 중 절반은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과 요구다. 전쟁에 동원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기존의 지원 단체나 연구자들이 마치 식민지 여성을 전쟁포로처럼 강제로 데려갔다는 말을 한 것이라면, 나는 국민으로 포섭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보이지 않게 차별하고 도구로 사용했는가에 관심을 두었다. 조선인 일본 군인의 경우, 이들은 정식으로 등록을 하고 사망하면 유족연금을 받을 수 있는 법이 있었다.

하지만 위안부에게 이런 게 없었다. 군대에서 하찮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매춘 차별 의식이 만든 생각이다. 군대가 있는 전쟁터로 끌고 가면서 아무런 법적인 틀이 없었다는 것은 차별의 소산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찍부터 해왔고 일본어판을 낸 이유이기도 하다. 국회 결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준(準) 군속으로 데려갔지만 정식 군속으로서 대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잊히고 있다. 실제로 일본 국회에서 군속으로서 보상을 논의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하면 지원 단체에서는 이제까지 주장한 것과 ‘다른 틀’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다. 실제로 검사도 원고 측 변호인도 그렇게 주장하면서 나를 비난했다.

- 잊히고 있는 것,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은 결국 비판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듣고 싶다.

20여 년이라는 공간에서의 싸움과 세계적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혐한(嫌韓)과 반일(反日)이 늘고 있다. 여성까지 포함한 혐한파(嫌韓派)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소녀상을 세운 직후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무조건 비난하기에 급급하다.

양쪽이 서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면서 혐한과 반일의 감정은 점차 커졌다. 그러다보니 중간 지점, 그러니까 다르게 생각하는, 합리적이면서 윤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설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런 중간 공간을 넓혀보고 싶었다.

   
▲ 서울 용산구 이태원입구광장에서 열린 '용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한 한 시민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혐한이나 반일이 객관적 인식의 결과라기보다 과거부터 쌓아온 정치적 입장 등에 따른 감성적인 재단(裁斷)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공간을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또 갈등만 낳았다. 우리는 일본의 혐한파나 우익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그들이 내놓은 정보를 제대로 비판해야 하는데 무조건 비난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갈등만 커지고 있다. 나로서는 이게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일본에는 진짜 차별주의자나 식민 지배에 긍정적인 이는 소수였다. 그런데 우리가 온갖 공격을 하게 되면서 일본의 보통 사람들도 그들(차별주의자 등 우익)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혐한파가 되어가면서 ‘진짜 차별주의자’들과 보통 사람이 섞여버렸다.

예전에는 화를 내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는 화를 내는 사람들로 변했다. 그들은 아베 총리가 추진한 한일합의조차도 비판한다. 다시 말하면, 한일합의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아베 정부는 우익의 반발을 억누르고 이뤄진 일이다. 동시에 정부 간 합의가 아니라 국민 간 합의도 필요하다.

※ 기사 출처 및 필자 : '사람과사회' 김종영 기자  


박유하 교수는...

서울에서 출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석사와 박사(일본 근대문학과 내셔널 아이덴티티)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임용돼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를 기획ㆍ편집하고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를 번역하는 등 근ㆍ현대 일본 문학과 사상을 소개하는 작업을 해왔으며, 민족제국젠더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일본 근대문학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을 시도해왔다. 또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연대를 모색하는 한일 지식인모임 ‘한일, 연대21’을 조직하고,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발언하면서 한일 간의 상호이해를 위한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ㆍ위안부ㆍ야스쿠니ㆍ독도>,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귀환문학론 서설-포스트 탈식민으로(일어판)>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마음., <만연 원년의 풋볼>,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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