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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고] 대한제국의 길을 걷다...훼손된 얼룩진 역사의 재인식 필요환구단 - 덕수궁 - 중명전 - 손탁호텔 - 구 러시아 공사관을 걸으며...
이재찬 자유기고가  |  dailiesnew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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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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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즈】이재찬 자유기고가

3ㆍ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는 지난 21일 조선호텔 앞 환구단(圜丘壇) 터에서 많은 시민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행사를 가졌다.

행사 후 참석자들이 함께 걷는 코스는 환구단 - 덕수궁 - 중명전 - 손탁호텔 - 구 러시아 공사관 순으로, 해설은 여느 때와 같이 서해성 총감독이 맡았다.

토요일 한가로운 오후였지만 비운의 길을 걷자니 날씨와 달리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 이어갔던 여정을 정리해 보았다.

첫번째 유적인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의 황제인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제천의식의 명분론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기우제의 필요성으로 원단의 설치와 폐지가 거듭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3년(1394)과 세종 원년(1419)에 일시적으로 원단제를 시행했으며, 세조 2년(1456)에 일시적으로 제도화됐으나 세조 10년(1464)에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은 '원구단'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반면, 우리는 독립성을 나타내기 위해 '환구단'이라고 부른다.

   
▲ 고종 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과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 ⓒ데일리즈

환구단은 1897년(고종 34)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단을 만들어 조성했다. 남별궁은 역대 왕들의 명·청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였다.

1899년 단지 내에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축조하고 태조의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했다.

1902년에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황궁우 옆에 세웠으나, 일제는 1913년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없애기 위해 환구단을 헐고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지금의 조선호텔)을 세운 것이다.

둘째, 덕수궁(德壽宮)은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많은 부분이 사라지고 훼손됐다. 일제는 우리 민족를 지배하면서 궁궐이 지니고 있는 국권과 주체성을 파괴하려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당시의 덕수궁 평면도를 보면 덕수궁 영역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궁 내 선원전(璿源殿) 터를 헐고 경기여고(전 경성제일여고)를, 길 건너 제사 준비소 터에는 덕수초등학교를 각각 건립했다. 지금의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정동 3번지 일대에 있던 귀족 자제들의 교육시설인 수학원(修學院)을 헐고 경성방송국을 짓기도 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일제 치하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으로 신변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해 1907년 물러나기까지 사용한 것.

당시 일제는 1880년대에 경운궁 터의 일부를 서구 열강(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게 공사관 부지로 떼어 주었다. 광무 11년(1907) 8월,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로 물러나 앉았다.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정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의 궁호를 따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부르게 된 것.
 
대한문은 지금은 덕수궁의 정문이지만 원래 경운궁의 동문(東門)으로 대안문(大安門)이라 불렸다. 경운궁의 정문은 중화전과 중화문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그 위치는 현재 서울시청사 별관 건물 자리이다. 덕수궁의 돌담길 또한 원래는 덕수궁 영역의 일부이다. 1922년 일제가 덕수궁 서쪽에 있던 선원전 터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면서 생긴 길이다. 이로써 동문인 대안문은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정문의 구실을 떠맡게 되고, 인화문은 정문의 기능을 잃으면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1906년에 '대안'이라는 이름이 불안하니 나라의 평안을 위해 '대한'으로 바꾸자는 풍수상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대한문은 1914년 태평로가 생길 때와 1968년 도시계획으로 인해 본래 위치에서 뒤로 밀려나는 수난을 겪게 됐다. 현재 지상에는 대한문을 오르던 기단 양옆 계단의 소맷돌과 조각된 서수가 남아 있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대한문의 현판은 당시 한성부 판윤을 지낸 남정철의 글씨다.

   
▲ 조선 황실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러시아식 2층 벽돌건물 중명전 ⓒ데일리즈

셋째, 사적 제124호인 중명전(重明殿)은 정동극장을 끼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다보면 막다른 곳에 위치한다. 중명전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1897년 경운궁의 확장과 함께 궁궐로 편입됐는데,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 의해 황실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러시아식 2층 벽돌건물이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과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됐다. 중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비운(悲運)의 장소다. 한일합방 뒤에는 외국인의 사교모임인 '경성구락부'로 쓰였다. 지금의 모습은 1925년 화재 후 벽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넷째, 손탁호텔은 1902년 정동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 경영의 효시이다. 손탁(Sontag, A. 孫澤, 1854∼1925)은 1885년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K. 韋貝)를 따라 내한해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활동했다.

손탁은 웨베르 공사 부인의 언니(처형)로 독일 국적을 갖고 있었고 많은 외국어에 능통해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대군주(고종)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됐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정책을 수립,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공로로 조선정부는 1895년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 정동 소재)를 하사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한국 최초의 배일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친미파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발족됐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토역(復讐討逆 : 복수를 위해 역적토벌)과 친일내각 타도를 억누르고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 구출하는 등을 정치적 투쟁목표를 표방하녀 손탁의 한옥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손탁 사저는 친러반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가 됐다. 1898년 고종황제는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구 한옥을 헐고 양관(방 다섯 개)을 지어서 하사했다. 이 때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필요해 1902년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 손탁으로 하여금 이를 경영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뒤, 1917년 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손탁호텔을 구입,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했지만, 1975년 소실되어 현재는 정동교회 뒤쪽에 공터로 남아 있다.

다섯째, 구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됐다. 이 건물의 설계는 중명전을 설계한 러시아인 사바틴이며,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다.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현재는 탑부만 남아 있는데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덕수궁까지 연결돼 있다. 이 건물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로써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해 있던 곳인데, 파천 중 친일세력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됐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다난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로 잘 알려진 구 러시아공사관에서 한국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고 남아있는 건물 일부. ⓒ데일리즈

지금은 6ㆍ25전쟁 때 건물은 파괴되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 있었는데, 1973년 현 모습대로 복원됐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지정했다.

이날 행사를 통해 "나라의 힘이 약하면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된다. 이로 인해국가의 정통성은 물론 유적과 유물이 훼손되는 얼룩지고 왜곡된 역사를 안게 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통감하게 됐다.

국가의 힘이란 통치자와 지도층, 그리고 국민 모두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줄 때 나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해서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

훼손된 얼룩진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노력과 역사교육이 수반될 때 우리의 미래는 유비무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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