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둘레길은 보물길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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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둘레길은 보물길 ⑨
  • 寒井 박춘식 자유기고가
  • 승인 2019.12.3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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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들의 공덕을 그린 선정비(善政碑) 중엔 ......


온온사(穩穩舍) 입구의 은행나무 아래엔 옛 과천현감들의 공덕비(功德碑)가 있습니다. 공덕비란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 고을의 수령이나 공적이 있는 분의 덕을 기리고자 백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비석으로 선정비(善政碑)라고도 합니다.
 
공덕비(功德碑)는 비문에 따라 선정비(善政碑), 불망비(不忘碑), 청덕비(淸德碑), 송덕비(頌德碑), 애민비(愛民碑), 청백비(淸白碑), 거사비(去思碑), 치적비(治績碑), 시혜비(施惠碑), 유혜비(遺惠碑), 근휼비(勤恤碑) 등으로 불립니다.
 
이러한 선정비(善政碑)의 시초는 중국 후한 때의 군수(郡守)였던 오장(吳章)의 선정비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전남 순천(옛 승평 또는 승주)에 있는 고려 때 최석(崔碩)의 팔마비(八馬碑)가 최초라고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미담이 있어 소개합니다.
 
『부사 최석(崔碩)이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 고을에서는 말을 보여주면서 "관례에 따라 말 8필을 드리니 맘대로 고르십시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석은 "말이 개경에만 가면 족하지 무얼 고른단 말인가."하였다. 그 후 개경에 무사히 도착한 최석은 말 8필을 돌려보냈는데 승평 고을에서 이를 받지 않았다. 이에 최석은 "나는 욕심쟁이다. 승평에 있을 때 우리집 말이 새끼를 낳았었는데...." 하면서 오히려 새끼 말 1필을 더 돌려보냈다. 이런 뒤로 태수에서 말을 주는 폐단이 없어졌고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이를 팔마비(八馬碑)라 하였다.』

 

과천현감비석군
과천현감비석군

 

이렇듯 선정비라는 것은 고을의 수령이 떠날 때에 백성들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세워지는 것이거늘, 어떤 선정비는 못된 수령들에 의해 이른바 입비전(立碑錢)이란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강제로 돈을 걷어서 세워졌고, 때론 수 십년이 지나서 그 후손들이 자기 가문의 자랑거리로서 세운 것도 많다고 합니다. 정조 때는 급기야 가짜 선정비를 쪼아 헐게 하는 선정비 정비작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조 사후의 세도정치 시기(순조~철종)엔 매관매직이 더욱 성행했고 그런 벼슬아치들은 가혹한 세금과 고리대금을 통해 재물을 축적하는데 급급했건만, 오히려 선정비는 이 시기에 더욱 난무하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게 아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무래질 하듯 돈을 긁어 가던 못된 수령들의 억지로 세운 선정비(善政碑)에 백성들은 그들 탐관오리가 떠난 후 글씨를 고무래 정(丁)으로 바꾸어 선정비(善丁碑)로 해 놓았다고 하는데, 혹여 어디선가 선정비(善丁碑)를 보신다면 꼭 연락주십시요. ^^

 
한편 온온사의 선정비 15기 중에 제일 뒷줄에 키가 큰 비석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비의 앞면에는 '행현감민공치록거사비(行縣監閔公致祿去思碑)'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즉, 과천현감이었던 민치록이 고을을 떠난 후, 그 선정(善政)에 감사하며 사모(思慕)의 맘을 담아 세운 비석이겠지요.
 
여기서 현감 민치록(1799~1858)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인 민유중(閔維重)의 5대손입니다. 민치록은 주로 지방관을 전전하다 50세가 넘어서 얻은 외동딸을 남겨두고 환갑을 못 채우고 세상을 뜨니, 그의 부인과 딸은 참으로 어려운 삶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조선에선 이제 막 왕이 된 어린 임금의 비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끊고자 오히려 외척이 없는 민치록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간택하였으니 그녀가 바로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가 되십니다.
 
이 곳 민치록의 선정비(善政碑)는 그의 과천현감 체직 60주년을 맞아 1894년에 세워졌으니  을미사변이 있기 1년 전이며, 대한제국이 선포되어 그의 딸이 황후로 추존되기 3년 전입니다.
 
거사비라고 새겨진 선정비의 뒷면엔 비를 만드는데 참여한 향리들의 명단이 적혀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론 이 비도 산 사람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민비의 명으로 세워졌으니 선정비에 대한 진정성에 의구심이 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비의 선정비를 세우고 1년후 너무도 원통한 죽임을 당하신 명성황후 민씨를 생각하니 참으로 애틋한 감정이 듭니다.


정조의 친필 편액이 걸린 온온사(穩穩舍)......

선정비과 은행나무가 있는 입구를 지나니 우측 산기슭에 온온사(穩穩舍)라는 현판의 조선시대 건물이 하나 덩그러니 있습니다.

'온온(穩穩)'은 경관이 아름답고 몸이 평온하다는 뜻이며, 정조14년(1790) 왕이 수원에 있는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과천 아헌(衙軒)을 ‘부림헌(富林軒)’, 내사(內舍)를'온온사(穩穩舍)'라 이름짓고 친히 편액을 썼다고 합니다.

옛 건물이나 정자 등에 가면 나무판에 글씨를 새겨 걸어둔 다양한 현판(懸板)들을 보게 됩니다. 경치가 좋아 시를 지어 새긴 것, 건물을 중수하고 중수기를 기록한 것, 효자' 열녀' 충신들의 공적 등을 기록한 것, 선현들의 행적이나 가르침을 새긴 것 등등.....
 
현판 중에서 특히 건물의 이름을 새겨 밖에 걸어둔  것을 편액(扁額)이라고 하는데, 편액은 대개 상당한 필력을 지닌 사람이 글씨를 쓰게 되며 일반적으로 한쪽엔 글씨 쓴 이의 낙관을 새겨 둡니다. 온온사(穩穩舍)의 편액엔 낙관 대신에 작은 글씨로 '御筆'이라는 명(銘)이 있으니 임금의 친필 글씨를 새긴 어필(御筆) 현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온온사(穩穩舍)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 건물입니다. 즉, 왕명을 수행하는 관리가 지방을 순시할 때 숙박하던 건물입니다.
 
객사는 이외에도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아의 현감과 아전들이 왕이 계신 궁궐을 향하여 향궐망배(向闕望拜)의 예를 행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객사는 수령이 사무를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고 건물도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온온사의 건물 기둥을 살펴보면 둥근 것과 네모진 것이 있습니다. 천원지방(天元地方)이라.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며 하늘은 곧 임금을 상징하니, ‘온온사(穩穩舍)’ 현판이 걸려있는 건물 중앙의 가운데의 둥근기둥 안은 바로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있는 공간인 것입니다. 옛부터 둥근기둥은 궁궐이나 사찰에서만 쓸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네모진 기둥만을 써야 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전패가 모셔진 공간의 문은 잠겨 있어서 미리 신청하지 않으며 볼 수 없습니다.  그 안엔 '부림헌(富林軒)'이라는 정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과천 현감이 정무를 보던 동헌을 정조는 부림헌(富林軒)이라 이름 짓고 친히 어필을 내렸는데 옛 동헌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과천초등학교 자리가 옛 동헌터 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전패(殿牌)는 왕을 상징하고 궐패(闕牌)는 황제를 상징하는 위패입니다.
 
온온사의 정당에 모신 전패(殿牌)는 궐패(闕牌)라 바꿔 부르게 되는데, 1896년 갑오제3차개혁의 칙령 제54호는 '지방의 각 부·목·군의 전패를 궐패로 바꾸어 부르는데 대한 안건'이었습니다. 궐패는 황제를 상징한다 했으니, 이 칙령은 조선에서의 중국황제의 종주권을 부인하면서 이듬해(1897년)의 대한제국 선포를 예비한 것이었습니다.
 

온온사 전경
온온사 전경

 

그 후 대한제국 광무11년(1907)에 고종황제는 전국의 객사를 학교로 전환하여 교육하도록 하게 하는데, "객사는 궐패를 둔 곳 외에도 큰 건물들이 있는데, 사신이나 손님이 머문 예도 없이 황폐하고 퇴락한 채로 방치하고 있으니....... 이제부터 수리하여 교사로 만들어 인재들이 학업할 수 있게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1912년 과천공립보통학교(현 과천초등학교)의 개교는 이러한 명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온온사 앞의 과천초등학교 교정에는 옛 과천관아의 건물 주축돌과 석재물들이 한 곳에 모아져 있으니 사라져가는 옛 흔적들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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