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둘레길은 보물길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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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둘레길은 보물길 ⑦
  • 寒井 박춘식 자유기고가
  • 승인 2019.11.02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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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南泰嶺)은 이름만큼 그렇게 큰 고개는 아닙니다. 대관령(大關嶺)처럼 높고 험하지도 않고 추풍령(秋風嶺)처럼 길고 깊지도 않은 고개이니 그냥 여우고개라는 이름이 훨씬 정겹고 좋습니다.
 
여우고개는 동서(東西)로는 관악산(冠岳山)과 우면산(牛眠山)을 가르고 남북(南北)으로는 서울특별시과 과천시를 나누고 있습니다. 여우고개는 한양에서 충청, 경상, 전라지역을 오고 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넘던 고개길입니다.
 
삼남지방을 왕래하던 우리 선조들이 수없이 걷던 길이기에 청운의 꿈을 실현코자 했던 선비들이 한양의 과거시험장으로 가기 위해 넘던 고개이며, 쓰라린 낙방의 아픔을 안고 다시 고향으로 향할 때에 넘어야 했던 서글픈 고개길입니다. 백의종군하여 떠나던 이순신장군도 이곳을 지나 인덕원에서 유숙(留宿)하였음을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정조 임금은 특히 화성에 있는 선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기 위해 여섯 번이나 여우고개를 넘나들었습니다.
 
필자가 수년전 홀로 서울에서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걷는 답사기행을 했을 때도 바로 이 곳 여우고개에서 출발을 했었습니다.
 
서울을 오가는 자동차로 가득한 남태령엔 과연 어떤 옛 문화 유산이 남아 있을까요?
 
다행히 이 곳에는 옛 사람들이 걷던 길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여우고개에서 사당역 방면으로는 옛길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여우고개에서 과천 방면으로는 옛 선조들이 걷던 삼남대로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과천루
과천루

 

고갯마루의 '남태령(南泰嶺)' 표지석에서 과천방면으로 내려가면 과천대로의 동측으로 과천8경중 제5경이라는 과천루(果川樓)가 세워져 있는데 계단이 만들어져 있지 않아 일반인은 올라가 전망을 할 수도 없는 높다란 원두막이며, 과천의 제5경이라 함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은 지저분하고 흉물스러운 모습입니다. 과천루 바로 아래쪽으론 작은 샛길이 있는데 이 길이 옛 선조들이 걷던 바로 그 삼남대로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옛 흔적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호젓한 숲길을 한참이고 걷었으면 좋겠으나 아쉽게도 숲길은 잠깐이고 금방 주택가로 이어집니다. 과천루에 올라 과천제5경을 조망하고 옛길 따라 흙냄새 맡으며 산길을 걸으면 좋으련만, 참으로 짧고 아쉽기만 합니다.


'남태령도신제(南泰嶺都神祭)'와 '서낭 신목(神木)'

 

남태령도당터
남태령도당터

 

과천쪽 짧은 삼남대로 숲길을 벗어나서 아스팔트 길을 700m쯤 걸으니 횡단보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걸으면 과천동주민센터 건물이 옛 성곽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도로가에는 '남태령도신제단(南泰嶺都神祭壇)'이라고 새겨진 비석과 오래된 서낭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오래된 느티나무 서낭목은 고사(枯死)하였고 대신에 고사한 나무의 안쪽에서 새로이 이식된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언 듯 보면 하나의 나무처럼 보입니다.
 
과천동의 옛 이름은 하리(下里)로써 남태령의 아랫마을이란 뜻입니다. 남태령 도신(都神)이란 남태령 아래 이 곳 마을을 수호하고 주민들의 길복을 지켜주는 도당신(都堂神)을 말합니다.
 
하리 도신제는 마을공동체 행사로서 음력10월 1일이 되면 주민대표들이 음식을 준비하여 송암사(松岩寺) 뒤편 도당터에서 마을을 수호하는 도당신과 잡병을 주관하는 구릉대감에게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이때 제사상에 올리는 밥은 산속의 도당터에서 직접 지어 올린다고 합니다.
 
산에서 도당제를 지낸 후엔 마을로 내려와서 이곳 서낭 신목에게 다시 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석하여 제를 올리고 주민 모두가 음복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습니다. 남태령도신제는 현재까지도 전통이 이어오는 행사이며 예전에는 제수비용 마련을 위해서 각 집마다 쌀1되씩을 추렴하곤 하였으나 요즘은 동사무소의 지원과 지역 유지들의 찬조 등으로 비용이 마련된다고 합니다.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동제(洞祭)는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도신제, 도당제, 서낭제, 성황제, 국사제, 별신제, 당산제, 부군당제, 할미제, 산신제, 산천제, 이사제, 골맥이제 등으로 불리고 있고 해안가 마을에서는 용신제, 용왕제 형태로 동제를 모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도신제, 별신제, 용왕제.....등 ‘제(祭)’라고 하면 유교적 제례절차에 따라 하는 것을 말하고 도신굿, 별신굿, 용왕굿....등 ‘굿’이라고 하면 무속인이 주재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도신제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한번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과 연관된 재밌는 설화가 중국의 습유기(拾遺記)에 전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강상(姜尙)은 오늘도 강가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과 낚시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없는 듯합니다. 곤궁한 처지에 남편은 일을 안하니 그의 아내 마씨부인이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고 먹을 것을 얻어와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마씨부인은 피죽을 끓여 먹기 위해 피를 마당에 널어놓고 혹 소나기라도 오면 걷어 놓으라고 강상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남의 집에 일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예상대로 소나기가 내렸고, 독서삼매경의 그에겐 빗소리가 들리질 않았으니 결국 널어 놓았던 피가 모두 떠내려 간 것입니다. 저녁에 돌아온 그의 아내는 너무도 남편이 무심하고 한심하여, 결국 남편을 버리고 스스로 집을 나가게 됩니다.
 
한편 널리 인재를 찾던 서백(西伯)은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범상치 않은 모습의 강상을 보고 그를 채용하게 되는데, 서백.... 그가 곧 주(周) 나라 건국의 기초를 다진 문왕이며 강상은 우리가 잘 아는 강태공(姜太公)이란 인물입니다.
 
강태공은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후, 마침내 제나라의 왕으로 봉해집니다. 어느 날 옛 자신이 살던 고향을 마차를 타고 지나다가 우연히 마씨부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개도 들지 못하는 마씨부인을 불러 세우니 그녀가 놀라며 다시 예전처럼 부부로 살아가자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강태공은 이에 그녀가 들고 있는 바가지의 물을 땅에 부으라 하였습니다. 그녀가 물을 땅에 쏟으니, 이제 그 물을 다시 주워 담으면 예전처럼 부부로 살겠노라고 말한 후 길을 떠났습니다.
 
마씨부인은 멀리 떠나는 강태공을 끝없이 바라보다 쓰러져 죽게 되었고 그 후 성황당의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황신목
성황신목

 

이 이야기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과 "성황당(城隍堂)"의 유래를 담은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왠지 마씨부인에게 연민이 가고, 강태공에게는 너무 야속하단 생각이 듭니다. 비록 마씨부인을 거두진 않더라도 옛 정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집 한 채라도 내려줌이 너그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낭목에 달린 하얀 종이돈은 마씨부인을 위한 후세 사람들의 연민일까요?
 
서낭목이나 서낭당을 지날 때는 돌맹이를 몇 개 던져주거나 침을 뱉어야 부정을 타지 않는다고 하니, 잊지 마시길.....   퉤퉤퉤~~.^^.

과천동주민센터
과천동주민센터

 
이제 과천동주민센터에서 서측으로 500m쯤 거리에 있는 송암사로 향합니다. 송암사 뒤편의 뿅뿅다리를 건너서 능선을 따라 200m쯤 오르면 첫 제(祭)를 지냈던 도당터가 있습니다. 이 곳 도당터의 제단은 관악산 정상을 향하고 있으며,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하겠습니다.
 
제단은 'ㄷ'자 모양으로 높이 1m내외로 석축을 쌓아 서쪽 관악산 정상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북측 석축에는 밥 짓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한때는 이 곳에 당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축과 제단만이 남아 있습니다.
 
제단에 술 한잔 올리고 절을 하니 앞으로의 ‘관악산둘레길’이 더욱 순탄할 듯 합니다. 함께 걷는 모든 분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살며시 도당터를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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