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冠岳山)둘레 이야기길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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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冠岳山)둘레 이야기길 ⑥
  • 寒井 박춘식 자유기고가
  • 승인 2019.09.0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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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즈   寒井 박춘식 자유기고가]
 

남태령역을 나서니, "이제 곧 과천 땅이구나....."

<춘향가>에서 '어사출행 노정기' 가사를 보면 "남대문 밖 썩 내달아, 칠패팔패(七牌八牌) 청파 배다리 지나, 동작(銅雀)이 얼풋 건네, 남태령을 넘어 과천(果川)들어 중화(中火)허고 사그내 밀렁당이, 수원(水原)들어 숙소(宿所)허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은 남대문을 나서서 칠패시장을 지나 청파동 배다리를 넘은 후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동작진을 거쳐 남태령을 넘은 후 과천에서 점심을 먹고 하는데, 이 노정길은 지금의 지하철 4호선 노선과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우리는 철마(鐵馬)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 땅 밑으로 이 곳을 지나고 있습니다.

남태령역 2번 출구에서 고갯마루를 향해 200m쯤 걷다보면 정각사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조계종 사찰이긴 한데 근래에 지은 듯한 대웅전 건물엔 단청이 없기 때문인지 일본의 절 같은 분위기가 풍깁니다.

대웅전 못 미쳐 입구엔 배가 불룩하고 익살스러운 얼굴의 커다란 포대화상(布垈和尙)의 석상이 있습니다. 포대화상( ?~916)은 당나라 때 승려이며 본명은 계차(契此)입니다.

예전에 경북지역을 대표하던 소주였던 금복주의 심볼인 '복영감'은 바로 포대화상을 형상화 한 것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포대를 메고 다니면서 가난한 중생들에게 재물과 복을 나눠주었으니 마치 포대화상은 동양의 산타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

포대화상
포대화상

 

一鉢千家飯 (일발천가반) 천 집 돌아 한 그릇 밥
孤身萬里遊 (고신만리유) 만리 길이 외로워라
靑日覩人少 (청일도인소) 한 낮에도 사람없어
問路白雲頭 (문로백운두) 흰 구름에 갈 길 묻네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미륵 참 미륵이여
分身千百億 (분신천백억) 천백억의 모습으로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그때그때 나왔으나
時人自不識 (시인자불식) 중생들이 몰라보네

포대화상이 남겼다는 위 시로 인해 그는 미륵의 화신으로 숭봉되어졌고 절집마다 입구엔 배 불뚝한 모습의 포대화상의 모습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태령표지석
남태령표지석

 

이제 정각사의 남쪽 우측 샛길로 나와서 500m쯤 더 고개길을 걸으면 우뚝하니 남태령 표지석이 보입니다. 드디어 서울을 떠나 경기도 과천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우고개'를 '남태령'이라 부르게 된 사연

남태령은 원래 여우고개 또는 호현(狐峴)이라고 불렸던 고개입니다.

정조임금이 원행길에 이 곳 고개에서 잠시 쉴 때, 고개 이름이 궁금하여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과천의 아전이 급히 '남태령'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는 지리에 밝은 신하가 있어서 "이 곳은 '여우고개'이거늘 어찌 거짓을 아뢰느냐?"하니까, 그 아전은 "감히 전하께 망령되게 여우고개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이에 정조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앞으론 남태령으로 부르라."하여 여우고개는 남태령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령(領)은 아주 높고 깊은 고개에 붙는 것 같습니다. 대관령, 죽령, 추풍령 등이 그 예이고, 좀 더 낮은 고개에는 현(峴)이나 치(峙)가 붙습니다.


한편 과천 여우고개에 대한 설화가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그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옛날 과천에 게으름뱅이 한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할 일 없이 빈둥대며 놀자니 부모님 잔소리가 심하여 이를 피해 이 곳 고개까지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고개에는 한 노인이 소 모양의 탈을 만들고 있었는데, 소년이 그게 뭐에 쓰는 것인지 물었더니
노인은 "일하기 싫은 사람이 이 탈을 쓰면 좋은 일이 생기네."하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름뱅이 소년은 '얼씨구나.'하면서 그 탈을 써보게 되는데... ,
'어라.' 탈이 얼굴에 척하고 달라붙더니 벗겨지질 않고, 아무리 벗겨달라고 소리쳐봐도 "음메~~" 하는 소리만 나는 거였습니다. 그러곤 노인이 소가죽까지 덮어 씌우자, 소년은 완전히 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노인은 소를 끌고 장에 가서 한 농부에게 팔아버리면서, "이 소는 무를 먹으면 죽게 되니 조심하시오."하더니 멀리 사라졌습니다.

소가 된 소년은 죽어라고 논과 밭에서 일해야 했으며, 잠시라도 쉬려하면 채찍까지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부의 아들이 소 앞에 무를 떨어뜨렸는데, 소가 된 소년은 "아!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그냥 죽어버리자."하면서 무를 얼릉 베어 먹었습니다.

그러자 소의 탈과 가죽이 몸에서 벗겨지더니, 다시금 사람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마을 사람들과 그 고개에 다시 와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만 도망을 하더랍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여우고개'라고 불렀으며, 게으름뱅이 소년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게 되었고 나중엔 과천 최고의 갑부가 되었답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
소가 된 게으름뱅이

 

과천시에서는 관문체육공원에 이야기 조형물을 만들어 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부터 여우는 아주 영리하면서 요망한 동물로 여겨왔으며 다양한 전설과 민담 속에서 여우는 신통한 존재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환경의 훼손과 나쁜 편견 속에 여우들은 거의 사라져가고 있으며 각종 설화들도 점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산하에는 여우가 살고 있을까요?

2004년에 강원도 양구에서 여우 수컷 한 마리가 사체로 발견된 후, 더 이상 여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월악산의 산양과 더불어 소백산에는 여우 복원사업을 계획하였고 마침내 2012년에 소백산에 18마리의 여우를 방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13마리는 폐사하였고 현재는 5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2015년 9월에 충북 음성에서 포획된 여우는 지난 2012년에 소백산에 방사한 여우는 아니라고 하며, 목에 목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사육하던 여우로 보고 있으며 현재 청주동물원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토종 붉은여우는 몸무게가 6kg 정도로 체격이 아주 작고, 주로 쥐나 개구리 등을 잡아먹으며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여우는 햇볕이 잘 들고 주위가 잘 보이는 구릉지를 좋아하는데, 이런 곳을 사람들이 주로 묘 자리로 쓰다보니 여우들이 곧 잘 무덤 속에 둥지를 튼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요사스럽게 보여서 사람들은 전설 속에서 여우를 구미호로 태어나게 한 듯 합니다.

 여우고개의 전설이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기 전, 정부의 여우 복원사업에 힘입어 귀여운 붉은여우들의 그 특유의 울음소리가 이 곳 남태령 골짜기에까지 다시금 울려퍼질 날을 기대해 봅니다.

" 아~ 우~~~ ^^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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