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冠岳山)둘레길은 보물길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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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冠岳山)둘레길은 보물길 ③
  • 寒井 박춘식 자유기고가
  • 승인 2019.07.0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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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즈   寒井 박춘식 자유기고가]

 

효민공 이경직 묘역(孝敏公 李景稷 墓域)의 이야기 길


 

후봉약수
후봉약수

 

남현동요지 위쪽에서 승방길을 따라 관음사(觀音寺) 방면으로 7분쯤 걷다보면 주택가가 끝나고 이제 산이구나 싶을 때 녹색천막의 배드민턴장이 나타납니다. 우측 배드민턴장 아랫길로 안내판도 없이 둘레길이려니 하고 200m쯤 걸으면 후봉수(厚峯水)라는 표지석의 폐쇄된 약수터가 있습니다.

후봉(厚峯)은 거북바위가 있는 관음사 뒤편의 산봉우리로서 관음사를 포근히 감싸는 형국의 봉우리입니다. 후봉약수는 언제부터인가 불소성분이 과다 검출되어 폐쇄되었는데 아마도 이 곳 계곡 위쪽의 폐쇄된 광산과 연관이 있을 듯 합니다.

후봉수약수 위쪽으론 효민공 이경직의 신도비와 묘역이 보입니다. 묘역은 메쉬펜스가 쳐져 있어서 아쉽게도 밖에서만 바라봐야 합니다.

신도비(神道碑)란 보통은 종2품(참판이나 관찰사 정도의 높은 벼슬)이상 고관들의 무덤에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비석입니다.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문에 의하면 이경직의 본관은 전주이며 호는 석문(石門), 8대조 할아버지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인 정종(定宗)입니다. 이경직은 인조 때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수원부사가 되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각각 인조를 강화와 남한산성까지 옆에서 끝까지 호종하였습니다.

호조판서, 도승지, 강화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죽으니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죽은 후 내린 시호(諡號)가 효민공(孝敏公)입니다.

효민(孝敏)하면 벌써 아! 효자셨구나 하고 생각되죠?

신도비에 의하면 이경직은 부모님의 병환시엔 옷을 벗지 않았고 잠자리에 들지도 않았으며 병이 심해지면 반드시 똥을 맛보고 변기를 닦았고, 몸소 부모님의 속옷을 빨고 옷을 입혀 드렸다고 합니다. 또한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아 약에 타서 올렸다고 하니, 그의 시호를 효민(孝敏)이라 함이 가히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경직에겐 18살이나 어린 동생이 있었는데 많은 나이 차이로 어린 동생에게 글과 예절도 가르쳤으니 이경직은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동생이 후에 영의정에 까지 오른 이경석(李景奭)이니, 여기서 인조와 이들 형제들의 이야기 하나 풀어보고 갈까 합니다.

능양군(綾陽君)은 반정으로 광해주(光海主)를 몰아내고 왕이 되니 그가 인조(仁祖)입니다. 아들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내던지는 등 자식을 미워하였고 세자빈에게까지 사약을 내렸던 어진 임금(?) ....., 하지만 인조는 세 번이나 전란을 겪으면서 수도 한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던 나약한 군주로 기억됩니다.

첫 번째는 반정공신이었던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니 충청도 공주(公州)까지 피난을 하였습니다. 피난길의 배고픈 인조에게 임씨 성의 백성이 떡을 올리니 떡을 먹어본 후 그 맛이 천하의 절미(絶味)라 하여 떡이름을 임절미....인절미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한편 이때 이경직은 전라도절도사가 되어 병사들을 모아서 난군 진압에 힘을 보태었습니다.

두 번째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인데,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약해진 명나라와 조선의 틈을 타서 후금을 세우더니 마침내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이때 이경직은 병조참판으로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하였고 후금과 형제의 화약을 맺을 당시에는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후금의 사신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세 번째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인데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다시 만만한 조선을 먼저 침략하는데 이제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를 요구합니다. 인조는 다시 한성을 버리고 피난을 하는데 이미 강화로 가는 길목이 위험하다하여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됩니다. 이때도 이경직은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하였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태종이 직접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포위를 하니 45일만에 식량부족으로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인조는 청 태종이 머물고 있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며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박았다는 의례)를 행해야 했던 처참한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후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비석을 세울 것을 요구해 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장유(張維), 조희일(趙希逸)이 지은 비문을 청에 보내는데 번번히 퇴짜를 당합니다.

사실 누가 오랑캐 왕을 칭송하는 공덕비문을 짓고 싶겠습니까? 결국 인조의 명으로 당시 대제학을 맡고 있던 이경석이 총대를 맡고 비문을 짓게 되는데 이것이 청나라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일명 '삼전도비(三田渡碑)'라 하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인조가 항복했던 장소에 세웠으니, 참 치욕적인 비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치욕의 상징으로 버려졌던 삼전도비 (KBS자료제공)
치욕의 상징으로 버려졌던 삼전도비 (KBS자료제공)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비석을 수장해 버리기도 하였으나 우여곡절 끝에 현재도 석촌호수변에 남아 있습니다.

한편 대제학 이경석은 삼전도비문을 작성한 후 글 배운 것을 평생 후회하였다고 하는데, 이경석에게 글을 가르켰던 그의 형 이경직은 삼전도비가 세워지고 몇 달 안되어 강화유수로 있던 중 졸하였으니, 아마도 화병으로 죽은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해봅니다.

우암 송시열 등 척화론자들은 두고두고 삼전도비문을 지은 이경석을 비판하게 되는데, 책임감 없이 명분과 명예만을 지키려는 척화론자들을 대신하여 치욕의 기록일 망정 진정한 용기와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책임을 다한 백헌 이경석에 대한 비판보다는 조선이 왜 이렇게 자꾸 남의 나라에 침략을 당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반성과 교훈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부끄러운 역사의 유물인 삼전도비를 보며 우리는 큰 교훈을 얻고 자주국방의 의지를 드높여야 할까요? 남 탓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효민공 이경직묘역
효민공 이경직묘역

 

효민공 이경직 묘역엔 맨 위로부터 부친 이유간(李惟侃)의 묘, 이경직의 묘, 아들 이장영의 묘가 차례로 위치하며 묘역 아래쪽에는 따로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지낸 이경직의 또 다른 동생 이경설(李景卨)의 묘가 있습니다.

이경직은 부친 이유간이 사망하였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청음(淸陰) 김상헌선생에게 묘지문(墓誌文)을 부탁하였습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길 주장하다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는 시조를 남기고 청나라에 끌려가신 김상헌의 시 한수를 읊으며 묘역 뒤편으로 해서 다시 둘레길을 걷습니다.

 

             관악(冠岳)의 돌아오는 구름           -  청음 김상헌

매일처럼 마루 밖의 푸른 산을 바라보니 / 日日軒窓對翠微 (일일헌창대취미)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 모두 천기이네 / 箇中飛動儘天機 (개중비동진천기)
외론 구름 무심하게 나간다고 말을 말라 / 孤雲莫道無心出 (고운막도무심출)
깊은 산이 그리워서 저녁마다 되온다네  / 猶戀深山暮暮歸 (유련심산모모귀)
                                           『 淸陰集(청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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