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적폐 청산의 처음은 박수칠 지 몰라도, 개혁의 제도화ㆍ의식화로 마무리가 궁극적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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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적폐 청산의 처음은 박수칠 지 몰라도, 개혁의 제도화ㆍ의식화로 마무리가 궁극적 목표"
  • 정리 : 신상인 기자
  • 승인 2018.12.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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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서거 3주기 – '사심(私心)을 벗어난 대의(大義)'를 지킨 한국인, 김영삼

[데일리즈 신상인 기자]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은 공(功)과 과(過)가 있다. '공과'는 역사의 평가를 받는다.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될 수 없는 역사의 잣대로, 단순한 평가를 넘어서는 가치를 측정받게 된다. 각종 굴곡이 넘쳐나는 우리 정치ㆍ사회 현실에서 정치인들은 '사심(私心)을 벗어난 대의(大義)'라는 평가를 통과하게 되면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부단하게 '이기적인 한국인'임을 생각할 때 시대를 강조한 인물이라면 이 '사심을 벗어난 대의'는 무척 중요하다. 군부독재 역시 쿠테타를 '역사적 대의 명분'으로 포장했고, 최근 논란의 중심인 사법 농단도 이 기준을 내세우며 조직을 감싸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심을 벗어난 대의' 입장을 성공적으로 도전하고 마친 사람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후배 기자와 함께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생각했다. 격변의 한국 현대사, 대권을 향한 소용돌이, 대한민국 사상 최초 민주화 정부 1기로서 일대기를 그렸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는 YS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는 인물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1987년 YS의 13대 대선을 돕기 위해 20대에 일찌감치 정계에 발을 들였고, 1992년 YS가 14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데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으로, 태생적 아들로서, 정치적 후배로서 YS의 정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이번 YS 서거 3주기를 맞아 YS의 정치적 업적을 재조명하고 문민정부를 돌이켜 보기 위해 '데일리즈'는 앞서 진행된 정치전문매체 '시사오늘'의 인터뷰 내용을 참고하고, 직접 듣기 위해 위해 지난달 27일 김 교수와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 2층에서 만났다.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데일리즈
김현철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데일리즈

문재인 정부, 1차적인 개혁인 인적 청산에 머물러…
"온 국민 동의한 '촛불의 의미'를 왜곡해선 안돼...1987년 운동권 사고에서 벗어나야"

- '사심을 버리고 대의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 YS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정책들 중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 경제 정책들인데, 현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와 비교되는 시점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개혁이라는 것은 인적개혁, 제도개혁, 의식개혁 세가지가 있는데, 현 정부의 개혁이라는 것은 인적 개혁 후 제도개혁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사실 문민정부의 개혁이라는 것은 인적개혁을 통해 기득권에 있던 사람들을 정리도 했지만 제도개혁으로 바로 들어갔다.  예를 들면  하나회 청산 이후 실제적으로 인적 개혁을 통해 정리도 했지만, 다시는 쿠데타를 하지 못하도록 입법적인 대통령령으로 조치했다. 공직자 재산공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개혁의 수순으로 제도개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제도개혁까지 마치고 나면 제일 어려운 의식개혁이 필요하다. 의식개혁까지 마무리돼야 하는데 기득권층이 반개혁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말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문민정부 때도 저항세력들이 많았다. 문민정부가 5년이 아니라 5년만 더 이어졌다면  의식개혁까지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는 점이다. 그 때를 기억하면 5년 단임 이라는 것이 얼만큼 힘든 건지 느낀 것이지만, 특히 개혁이라는 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거다. 문민정부 당시 지방선거나 풀뿌리 민주주의, 5ㆍ18특별법 등을 제도화 시켰는데 반면 현 정부는 제도개혁을 못 이루고 있다.”

"선거공약일수도 있고, 경제 정의, 분배 정의라는 측면에서 왜곡된 분배를 바로잡는다는 큰 방향은 맞지만 방법론에서는 전문가들하고 야당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 동의를 구해서 해야 되는 게 사실인데, 그러지 못했다. 개혁과 추진을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추진하면 혼란이 올 수 있다. 미국처럼 트럼프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다시 말해 정치가 잘못돼도 경제만 잘 버티면 사실은 제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만 굴러간다면 굉장히 공고하게 힘을 받고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는데…지금 대표적으로 소득주도 성장, 탈원전 정책 같은 정책과 개혁들이 모두 국민들에게 공감을 주지못하고 추진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 총론은 맞으나 방법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네요…

"제도화를 해야 하는데 제도화가 안됐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원론에도 없는 이야기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임상실험처럼 실험한 것을 그냥 가져온 것 뿐이라고 한다. 말은 싱가포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지만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와 국가형태가 다르다. 거기야 말로 국가주의 아니냐하는 것이다."

"우리가 촛불을 왜 들었나? '이게 나라냐'라는 시위에 의해서 개혁으로, 결국 '촛불 혁명'까지 갔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가지고 '나라를 바꿔보자'로 된 건데...이건 온 국민의 성원을 입어 대통령으로 당선된건데, 지금은 상당히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책들로 문제가 만들어지고 있다."

"YS가 추진했던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등의 개혁들은 전 국민이 환영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 국민들이 요구했던 부분이고 정치인들이 체감했던 부분이다. 문민정부는 그런 것들을 맞춤형으로 개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히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책들만 골라서 개혁이란 이름으로 추진했다. 적폐청산은 필요하다. 그건 인적청산이다. 사실은 우선순위의 문제와 1단계의 초기적인 (인적)개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건 아니다. 처음엔 박수칠 지 모르지만 그건 잠시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제도로 정착되지 않으면 쉬 피곤해진다. 개혁 저항세력들이 생긴다. 결국 그런걸 통해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로 정착되는 것이 궁극적인 개혁의 목표인데, 못 만들고 있다.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된다."

- 그러면 문민정부는 시대적인 흐름과 국민이 원해서 만들어졌는데…박근혜 정부의 반향적 탄생으로 탄생한 현 정부는 그것이 모자란 것인가

"사실 문민정부의 '시대정신'이라는게 '독재청산'이었는데, 혁명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 냈다. 국민들은 거기에 박수를 치는 거다. 현 정부는 분명히 '촛불의 의미'가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데, 다시 말해 국민들이 뭘 바꾸려고 하는지를 모른 채, 정부 출범 1년 반이 됐는데도 아직 개혁의 1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다. 그건 시대정신에 있어서도 부족하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문민정부는 과거에서 미래로 빨리 전환을 했다. 인적청산에서 제도개혁으로, 대통령령에서 입법으로 다 전환했다. 하지만 현 정부는 논란거리만 만들고 있다."

- 문재인 정부가 '촛불의 의미'에 부흥을 못하고 있는 거네요

"못하고 있는 거다. 대단히 문제가 있다. 앞으로 5년 단임이라고 하면  첫 해, 둘째 해까지 길면 3년째까지 개혁으로 가고, 3년차부터 레임덕을 준비하거나 대비해야 한다. 1년차, 2년차에 모든 개혁을 완수하고 제도로 정리를 해야하는데 1년반이 흘렀음에도 정리는 커녕 역풍만 남길 소지가 많아졌다는 것이 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공직자 재산공개, 그걸 제도화 시켰고, DJ 정부에서는 인사청문회로까지 발전했다. 세상 어디나 '인사가 만사'다. 그만큼  청와대든, 내각이든, 당(黨)이든 모든 정부와 같이 유지되는 그룹들이 능력 위주, 소신 위주의 인사들로 이루어지고, 탕평책처럼 개혁에 걸맞는 인사들을 발탁을 해야 했는데, 지금은 인사 조차도 너무 자신들 위주로 구성됐다. 정권이 바뀌기 전,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직접 만나 본 당시 문 후보를 굉장히 좋게 생각한 이유 중 하나가 '이 사람은 정치를 오랜동안 하지 않아서 순수하고 정말 개혁에 적임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버님이 남들이 못하는 금융실명제, 하나회 청산 등을 한 것처럼...당신이 깨끗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문 후보도 그런 DNA가 있었던 것으로 믿었다. 초기에 문재인 정부가 그런 소질이 보였다. 그래서 믿었다. 초반에 빨리 적폐청산을 하고, 바로 개혁에 들어가고 소위 탕평책을 사용했던 아버님의 유지인 '통합과 화합'으로 기조를 가져가겠구나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보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모든 것이 운동권 출신에 쌓여 가지고, 누가봐도 위험한, 상당히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상대에게 빌미를 줄 수 있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다."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 ⓒ사진 협조 = 시사오늘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 ⓒ사진 협조 = 시사오늘

제한되고 편협된 인사 결과로 그 이후까지 '인의장막' 펼쳐져...경제수장 두 명은 왜 교체되는가?

"인의장막에 쌓여가지고...결국 경제수장도 한꺼번에 두 명이 그만둔 것 아닌가. 그들의 잘잘못도 가리지도 못했다. 실질적으로 뭘 잘못했는지, 대통령 스스로도 이야기기한 적도 없고, 공동책임이라고해서 경질했지만...그것이 과연 경제참사에 의한 문책인지, 아닌지...그런데 그 이후에 정책의 방향은 계속 고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동안 두 사람이 손발이 안 맞았던 것은 한 사람이 좌지우지 하도록 만들어서라고도 하고...그런 인사정책 굉장히 위험스러운 것이다."

"아버님은 '머리는 남의 머리 빌릴 수 있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 이런 말씀도 하셨던 것처럼 지도자는 사실 모든 걸 다 잘하는 것이 아니다. 레이건도 사실 그런 스타일이었다. 경제는 참모한테 맡겼다. 실질적으로 전문가를 중시해야하는데, 너무 운동권만 곁에 두고 있다. 참모들을 좀 잘 세워야하는데...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운동권이다."

- 운동권, 소위 1970~80년대 운동권이 고생한 면, 좋은 면도 있지만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모두 완벽한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미 1970~80 년대 사고를 말하다보니까 이런 미래지향적인 다변화 된 사회에서 그런 단선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군다나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다면, 그런 우월감이 있어야 되는데 오히려 그것들이 본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냥 본인들 스스로가 '지고지순(至高至順)'하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불의를 못참는 DNA…"일본이나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한결같아"

- 문민정부의 가장 첫 행보는 '하나회 청산'이다.(시사오늘의 질문과 답변 내용)

"하나회 청산에 대해, 단순히 '정치군인들의 사조직을 제거했다'는 정도로 생각해선 안 된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에 해외 언론들은 '군부청산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우선 3당통합에서 민정계가 다수 지분을 가지고 있고 민주계가 소수인 상황에서 그런 엄청난 개혁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또 하나 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당시 군인들이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일명 '국방위 회식사건'인데, 1986년 육군 수뇌부가 국회 국방위 소속 의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몇몇 국회의원들이 폭행당했던 것이다."

"너무 빨리 진행되는 하나회 척결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부통치를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완전히 끝내면서 완벽한 민주화를 이룬 혁명의 첫 단추를 제대로 꿰었다. 이러한 조치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악순환의 고리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하나회 숙청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 두번째 역사적인 업적으로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시사오늘의 질문과 답변 내용)

"하나회 청산이 정치적 혁명이라면 금융실명제는 경제적 혁명이었다.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지만, 일본은 지금도 해내지 못하고 있지 않나. '금융실명제'의 부정적 영향이 얼마나 크겠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좌고우면해서 시간을 끌 사안이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 모두 금융실명제를 하려는 노력을 나름대로 했었지만 정경유착이 이미 너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래서 청와대 내부를 위시해서, 경제관료들도 신중해야 한다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었지만 YS는 강력히 추진했다. 아마도 그 때 못 했더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든다."

- '공직자 재산공개'…YS는 자신부터 전 재산을 공개하면서 솔선수범했다.(시사오늘의 질문과 답변 내용)

'본인이 솔선수범해서 결국 법제화까지 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금융실명제와 같이 YS 자신이 금전적인 부분에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깨끗한 정부를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게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직접 대통령의 개인 재산부터 공개한건데, 내각의 장ㆍ차관, 그 다음엔 국장급, 8급ㆍ9급 공무원까지 내려갔다. 결과적으로 상당히 많은 공직자들이 옷을 벗게 됐지만 이것은 청렴한 공직자상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었다. 그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이뤄내면서 DJ정부 때 인사청문회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런 문민정부의 개혁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통성'이 필요했다. 정통성의 배경에는 군정종식을 중심으로 한 '시대정신'이 깊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 위에 대통령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마음가짐, 평생 민주화를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군사독재와 싸워왔던 정의감, 불의에 대한 반발 등이 평생 쌓여서 결과적으로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는 과감함, 솔선수범이 몸에 밴 거라고 본다."

- 네번째 업적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말한다. 특히 YS는 평소 일본에 관해서 더 엄격하게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는지...

"그건 아무래도 일제시대부터 성장과정에서 체득하고 겪으신 거니깐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 당시에 일화도 많이 있다. 중학교 때, 설탕을 짊어지고 일본군함에 싣는 일에 동원이 됐었는데 일부러 설탕 가마니에 구멍을 내 흘려버렸다. 그러다가 들키는 바람에 무기정학을 당하셨는데 다행히 하루 이틀 몸이 안 좋다고 고향에 내려가셨다가 해방이 된 거다. 하여간 그런 아버님은 선천적으로 불의를 못 참는 DNA를 갖고 계셨고, 집안 자체가 그러셨다. 뭐 어렸을 때 서당에서 글을 배우셨던 점이나 가부장적인 가정교육,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도덕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사실 어렸을 때부터 쌓아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됐다고 본다. 그리고 사실 그런 일제시대를 겪은 것도 있지만 미국 클린턴 대통령 당시에도 북한 영변 폭격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우리 대통령으로서 할 말을 다 했었다."

"그때도 거의 전화로 싸우다시피 하면서 결국은 폭격을 못하게 마무리 지은 거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한국에 있는 민간 미국인들,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을 전부 소개하려고 소개령을 내렸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는데 그걸 YS가 미리 알고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 담판으로 무산시킨 것이다. 특히 조깅 일화가 있지 않나. ㅎㅎ 1993년 클린턴과 아침 조깅을 하다 결국 마지막엔 조깅이 아니라 100m 막판 스퍼트 하듯이 달리는 모습이 화제가 돼기도 했다."

YS 차남 김현철. ⓒ사진 협조 = 시사오늘
김현철 교수. ⓒ사진 협조 = 시사오늘

"어찌보면, 정통성과 정당성이 부여된 정부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일본의 여러가지 과거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도 강하게 대처를 한 것이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일본이)보상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상은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보상과 배상은 다르다. 보상은 사고가 나면 위로금처럼 주는 거지만, 배상은 제도적으로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위안부 할머니들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우리 정부도 그건 일본정부가 과거에 대해서 당연히 사과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거기에 대한 국제법에 따른 배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뒤로 뭘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에 단호하셨고,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고...그 다음 조선총독부 철거는 하이라이트였다."

우선 문민정부는 1995년 '중앙청'이라 불리며 경복궁 정문에 자리하고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부터 약 20여년간 우리 국민을 수탈하던 일제 식민통치 총 본산의 상징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내부적인 반대도 많았고, 일본은 이 건물을 모든 비용을 들여 스스로 철거해 가겠다고까지 제안했지만, YS는 일관된 의지로 이 흉물을 제거했다.

둘째는 같은 해 짱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회동한 자리에서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라고 발언하면서 당시 독도와 동해상에서 한국 해군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일본의 연이은 망언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경 대응도 이러한 맥락의 기조 위에 있었다.

- 그런데 자유한국당에서 이승만ㆍ박정희ㆍ김영삼 사진을 나란히 내걸었다. 그러면서 정통 보수, 신보수주의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평생 민주화에 대한 YS의 헌신을 '3당 합당'으로 매도당하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때 홍준표 대표가 갑자기 느닷없이 아버지 사진을 모시겠다고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아버님 사진 이렇게 세 분 사진을 걸었다. 그것도 우리하고 사전조율도 없었다. 느닷없이 아버님 사진을 걸겠다고 하니 나도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모시겠다고 하는데 그걸 안 된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상도동으로 사진을 좀 달라고 했을 때 다른 비서가 결정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결정할 문젠데...여러가지 고민을 하다가 그거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사전에 그렇게 아무런 양해도 없이 그냥 불쑥 언론에다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잘못됐다. 그 때문에 그쪽에다가 분명히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진 않더라도 잘못됐다는 의사를 꼭 전달하라고 말하면서 수락했다."

"사실 3당 합당 얘기는 개인 SNS에다가도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이제 여당이든 야당이든 특히 민주당이 야당일 때이지만 어떤 후보를 지지한다는 공식적인 얘기를 하기 전에 3당 합당 얘기를 꼭 한단 말이에요. 특히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에게 SNS에다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무슨 반발이냐하면, 진짜 YS가 없었으면 DJ와 노무현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 얘기는 뭐냐면 YS가 목숨을 걸고 군부를 청산하지 않았으면 DJ가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고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도 될 수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3당 통합을 비판하는 점에서 DJ는 DJP(김대중+김종필)를 했다. 3당 합당과 DJP와 차이가 뭐냐? 그 다음에 노무현 대통령은 정몽준과 단일화를 도모했다. 그거와는 차이점은 뭐냐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순수 민주세력으로만 정권을 잡았느냐. DJ와 노무현 대통령 역시 아니지 않느냐. 그만큼 1987년 대선 때 야권이 그렇게 주장했던 YS와 DJ의 단일화를 사실 두 사람 다 결과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나중에 비판을 받지 않았나. 그 당시에 아버님은 고민을 했었다. 진짜 대선 후보를 내려놓고 DJ를 밀면 민주세력의 DJ가 당선될 수 있을까. 그때 그 결과는 절대 DJ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을 하셨다. 왜 그러느냐하면 군부가 있었기 때문에 군부가 DJ를 가만 안 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적인 것 때문에도 그렇고, 할 수 없이 1987년에 끝까지 통일민주당(민주당)의 대선 후보 단일화를 하려 했지만 DJ가 이런 저런 이유와 단일화 표 대결 때 지고나면 정계은퇴한다고 했다가 은퇴는 커녕 평화민주당(평민당)을 만들면서 빠져나갔다. 결국 야권에서 주장하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1987년 대선에서 YS는 2위(28%)로 낙선했다. 그 다음해인 1988년 총선에서 DJ가 강력히 주장한 소선거구제를 통해 1노 3김의 4당 체제(노태우-민정당, 김종필-공화당, 김영삼-민주당, 김대중-평민당)가 고착화 되면서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정국을 장악했다."

"그러한 4당 체제의 고착화는 다음 14대 대선에도 또 야당이 분열되고, 또 다시 YS 와 DJ가 대결할 수밖에 없는 구도이기 때문에 영원히 정권교체는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YS는 사실상 정치생명을 건 코페루니쿠스적인 발상을 한 거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때려 잡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만 그때는 워낙 민정계가 다수였고 민주계가 소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를 만들어 냈잖나. 민주화 정부 1기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하나회 청산 등 각종 개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 그건 위로부터의 혁명을 한 거다. 유혈 사태 등으로 점철됐던 아래서부터의 혁명은 불가능했다. 정권을 바꿀 수 있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서 기득권 세력, 과거의 군부세력들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당시에 합당이라는 것이 민정계 세력 밑으로 들어가 자리나 한 자리 하려고 했다면 그건 야합이다. 하지만 3당 합당이 야합이 아닌 이유는 다수의 민정계들을 극복하고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YS 마지막 유언 "'통합과 화합'은 반드시 정치권이 지켜내야 한다"

김현철 교수. ⓒ사진 협조 = 시사오늘
김현철 교수. ⓒ사진 협조 = 시사오늘

'3당 합당'에 대해 일부 매체들과 정치인들은 영ㆍ호남 지역구도 고착, 영남 지역패권주의 심화, '기형적 보수 우위'의 정치지형을 강화한 '배신의 정치'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한다. 1988년 총선에서 빚어진 여소야대 구도는 당시 차기 대선 주자였던 노태우 민정당(집권 여당) 대표로서는 국면 탈피가 절실했다.  DJ의 평민당(70석)에 이어 제2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일명 꼬마 민주당, 59석)의 YS로는 대선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그런 노태우와 YS의 정치공학적 이해가 맞물리며 3당 합당이라는 '보수 대연합'으로 이어졌다는 데엔 큰 이견이 없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내 노무현ㆍ이기택ㆍ김정길ㆍ김상현ㆍ박찬종ㆍ홍사덕ㆍ이철 등 8명의 의원들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했다.

그 당시 '3당 합당'을 주도한 쪽은 '독재세력에 대한 투항ㆍ변절'이라는 평가를 단호히 부정한다. 김덕룡 전 의원은 "당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며 "여당은 군사정권 하나였고 야당은 셋으로 갈라져 아무리 선거로 싸운다고 한들 결과가 뻔했다. 군부통치라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 정치사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시작하는 출발점을 3당 합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3당 합당 직전의 4당 체제를 혼란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특히 재벌, 군, 관료들이 여의도 정치를 무서워했던 때는 그때가 유일했다"고 짚었다.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큰 틀에서 보면 3당 합당이 지배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군부세력을 밀어내는 결과로 이어졌다.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문민정부는 시기적으로 훨씬 더 뒤로 미뤄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짧은 기간 4당 체제에서의 합종연횡보다도 의미가 크다. 3당 합당의 결과는 하나회 척결과 전두환ㆍ노태우를 법정에 세우는 상상도 못할 결과로 이어졌다. 호랑이를 잡은 것"이라고 전했다.

- 또 하나가 '문민정부 IMF 사태'는 과(過)로 꼽힌다. 이 같은 평가에 대한 생각은... (시사오늘의 질문과 답변 내용)

"우선 IMF를 '국가부도'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됐다. 외환보유고가 갑자기 사실상 동이 나면서 그 여파로 여러 기업이 부도가 나기도 했지만, 정말로 국가가 부도가 난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문민정부에 총체적 관리 책임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상당히 복합적인 요인들이 그 배경에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것들을 보지 않고 일단 문민정부, YS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몰아간다. 그 편이 간단해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야당의 반발, 국제정세, 군부독재시절 쌓여온 문제 등이 한 번에 터지면서 생긴 일시적 외환위기다."

"문민정부 당시 1994년 세계화추진위원회, 1996년 OECD도 가입하는 등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등을 맞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노동개혁'과 '금융개혁'도 추진하려 했지만 실제 외환위기가 터진 후 IMF가 우리에게 강제로 명령한 두 가지 요구사항이었다. 하지만 야당과 노동계에 의해서 사실상 무산됐다. 금융개혁도 사실 한국은행 독립까지 생각한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이 두 가지를 야당이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IMF 외환위기는 오지 않았다."

"또한 외적으론 아시아권 전체의 외환위기, 경제위기가 도미노처럼 밀려 오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히 전체적인 '경제 위기'나 국가의 '부도 사태'는 아니었다. 외환의 일시적 고갈이다. 요즘 같으면 여러 가지 대처 방법이 제도화돼 있고 그래서 괜찮지만, 그 당시는 처음 맞는 위기라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IMF가 상당히 복합적인 요인으로 촉발된 위기라고 해도, 문민정부도 관리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기에 그 업보일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다만 다음 DJ정부에서 모든 걸 문민정부 책임으로 몰아버렸던 점이다. '환란 청문회'를 열고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 김인호 전 경제수석을 제물로 삼지 않았나. 아버지(YS)도 청문회에 세우려 했다고 들었다. 문민정부가 전부 잘했다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고, IMF의 책임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게 무작정 모든 문민정부의 과(過)로 매도하는 게 그저 안타깝다."

- '처세의 달인' YS, '정치의 9단' DJ와는 민주화의 동료였으나 평생 라이벌이기도 하다. DJ가 먼저 화해한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YS는 마지막에 DJ를 찾아 화해를 시도했다. 어떻게 보나…

"DJ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버님이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하셨다. 전ㆍ노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고 사면할 때는 그렇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DJ가 요구한 측면도 있었고 해서 전ㆍ노를 사면했다. 하지만 DJ하고 화해라는 것은 너무너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76년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결국 DJ와 같은 당 소속 이철승 의원이 2차결선에서 DJ손을 드는 바람에 역전이 됐잖나. 아버님 쪽 사람들이 이건 승복할 수 없다.  현 정부가 도와줘서 된거 아니냐고 성토했고, YS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적인 경선절차를 통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승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셨다. 정치적 '승복 문화'를 처음 만들었다. 아버님은 민주주의 경선문화에 대해서 투철하셨던 분이다. 아버님은 끝까지 의회주의에 남아 있는 거다. 남들과 차별화 한거다."

"IMF도 왔고, 아버님 책임도 아니고 외적인 요인들이 있다고 해도 다 내적인 나라망신, '깡통'이라며 비아냥거리면서 환란 청문회에 YS를 내보내려고 했다. 당시 내 생각은 너무나 배신감을 느꼈다. 'YS가 아니였으면 DJ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냐'였다.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왔다. 민주당 내에서도 구파 신파로 불리듯이...그런대도 DJ가 세브란스 병원에 계실 때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겠다는 판단을 하신 거다. 아침에 느닷없이 갔다와야겠다고 하시길래, 나도 '잘 생각하셨다. 대승적으로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YS는 그 많은 생각이 있었음에도 화해를 먼저 하셨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3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 인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3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 인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 서거 후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아들'을 자처했다. 그들이 과연 정치적 후계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런 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정치적인 아들이든, 후계자이든 모두 좋은 현상이다. 개혁 지도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인거 같다. 아버님이 많은 사람을 배출 했잖아요. 15대 총선때 특히 YS키즈 한 사람이라도 더 발탁을 해서 지도자급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좋은 거죠. 나도 아버님 기념사업 외에 일본 '다케시마 정경의숙'처럼 지도자를 키우는 정치아카데미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아버님의 오랬 동안 정치수업을 받은 탓이기도 한 거죠."

2015년 YS서거 당시 49제 대신 치러진 추도예배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일제히 고인의 유지인 '통합ㆍ화합' 메시지를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고인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대통령께서 떠나신 뒤에 그의 업정에 대한 평가가 부활했다"며 "'부활'이라는 말이 딱 맞는 말"이라고 '역사적 재평가'를 강조했다.

서청원 새누리당 전 최고위원 역시 "어른께서 돌아가신 후에 민주화 운동에 애쓰시며 역사에 큰 역할을 하신 것이 다시 알려져 기쁘다"며 "어른의 업적이 재조명 돼 국민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길 기원한다. 그런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치인들의 "사심을 버린 대의"가 아쉽다는 지적이 많아지고 있다. YS를 기념하고 '정치적 양자'를 자인하는 것 조차 '사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3년째를 탈상이라고 하잖아요. 아버님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더욱 추모 분위기가 강해지고, 정치권 여야 할 것 없이 애도하는 마음이 고맙다. 아버님의 마지막 유언 '통합과 화합'을 반드시 정치권이 지켜내야 한다. 아버님의 큰 과업은 민주주주의를 개혁하자고 주장하셨는데 그런 작업을 기념사업회에서 제대로 해야겠다. 소위 말하는 'YS 정신'을 다시 되새기고, 그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현실 정치에  대입을 시켜야 될 것 아니냐"라고 YS 3주기를 갈음했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 시도인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선봉에 섰다가 초산 테러까지 당했다. 1979년에는 야당인 신민당 총재로 선출됐지만 직무집행 정지와 함께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하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쳤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가택연금을 당했고, 1983년 5ㆍ18 민주화운동 3주년 때는 민주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은 1985년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과 1987년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군부 정권의 사실상 항복선언인 '6ㆍ29 민주화 선언'을 이끌어 냈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을 결행했고, 2년 뒤 대통령에 당선돼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면서 30여 년 간 지속됐던 군사 정권을 실질적으로 종식시켰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12ㆍ12 사태의 주역이며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인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함으로써 군의 정치 개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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