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기고 2] 박정희 정권의 한일청구권에는 강제징용자들이 없다...그 이유는?
[단독 기고 2] 박정희 정권의 한일청구권에는 강제징용자들이 없다...그 이유는?
  • 이요한 기고, 정리 : 전은솔 기자
  • 승인 2018.11.0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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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야기, 새마을운동과 대일 협상은 징용노동자에겐 슬픈 상처와 지워진 역사

[데일리즈 이요한 기고, 정리 : 전은솔 기자]

일본에서 거주하는 재일교포 2세로부터 도착한 편지는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고충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를 소개하며 징용에 대해 일본에서의 관심이 필요하고 보상 또는 역사문제에 대한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관심있는 관계자나 같은 경험을 한 역사적 증인이 있지 않을까 해서 ‘데일리즈’는 공유하고자 기고를 전한다. <편집자 주>

# 세번째 메일

회신과 인터뷰 내용 정리해 주셔서 먼저 감사합니다. 과거 한국의 호적신고 등 기록 처리가 순조롭지 못한데다가 지식과 학벌위주의 사회분위기 조성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모두 무학(無學)이십니다. 옛날 서당(글방)의 환경도 없는 곳이었기에 자식들이 배우지 못하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국가라는 생각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학벌과 명문과 지식이 특권처럼 되어버린 사회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라고 봅니다.

일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인을 하게 되었고, 당시 호적 신고와 혼인 신고도 허술한 제도였습니다. 무슨 학식이 지식층의 특권처럼 신고 양식이 한문이라 무학인 부모님는 그저 검은 글에 흰 종이에 불가했습니다. 당시 그러한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지방에는 더했구요.

혼인 후 큰형님이 태어나기 전 첫 임신해서 태어난지 두 달만에 목숨을 잃은 누님이 원인이었는지 어머니가 불치병으로 갖은 고생을 하며 무속인의 굿도 해보고, 한방 약초도 다려 마시기도 하시다 같은 동네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된 감리교회(충남 청양군 정산면)를 다니시며 나아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시시면서 기도 가운데 병이 나았고 큰형님을 임신하여 무사하게 출산, 막내로 제가 태어나기(66년생)까지 매일 10리씩 새벽 3, 4시 어둠이 짙게 깔린 산과 두 개의 고개를 넘어 왕래하시며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울에서 부흥강사로 오신 목사님들을 통해 서울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으려면 서울로 상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셨고, 또한 그때 그러한 이유를 포함해 당시에는 전국 각 도, 군, 면, 읍, 리 사람들이 서울로 상경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유 중 하나가 서울에 가면 무료로 토지가 분배되고 일할 수 있는 일터도 보장 된다는 정보였는데 당시 정부의 술책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아버지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당시 시골 논밭 등을 거의 헐값에 팔아버린 탓에 아버지께서 다시 1972~1973년쯤 고향으로 돌아가셨지만 남의 집 머슴처럼 농사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이버지가 고향으로 하경하시고 나서 얼마 있다가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면서 농가 개량, 논밭 개간을 추진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시대는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혜택은 하나도 없이, 잘못된 정보를 이용해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정치권력들에 의해 시작된 ‘새마을운동’임을 뒤 늦게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서울과 충남 청양만 왔다, 갔다 했던 꼴이 됐습니다. 거기에다가 박정희 정권이 1965년 일본으로부터 강제징용 배상금 보상 받았다는 정보도 아버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과 출생년도까지 바뀌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 채 살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도 그대로입니다.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차례 만나 한일 청구권을 마무리 했고, 1965년 6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정희,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인터넷 커뮤니티
1962년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차례 만나 한일청구권을 마무리 했고, 1965년 6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정희,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인터넷 커뮤니티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에 제공한 ‘무상 3억ㆍ유상 2억 달러’로 징용 문제는 해결됐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당시 국교정상화를 위한 제1차 한일회담 당시 한국 정부가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 항목 중 제5항에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를 적시했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은 식민지배와 강제징용의 합ㆍ불법을 따지지 않은 채 정부 간에 체결된 조약은 피해자 개개인의 배상 청구권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5억 달러는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등 국내 인프라 건설로 돌려져 ‘한강의 기적’의 종잣돈이 됐다. 당시 한국의 1년 국가 예산은 3억 달러 정도였다.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이덕보원(以德報怨 :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 차원에서 청구권을 포기했다. 박정희 정권처럼 개인 청구권을 정부가 떠맡아 해결하겠다는 협정은 맺지 않았다. 지금 중국인 징용피해자들의 소송에 일본 기업들이 화해의 자세로 나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청구권협정의 효력을 재검토해 강제징용 피해자는 청구권협정의 대상이었다고 정리했다. 이후 정부는 2015년까지 7만여 건에 대해 최대 2000만 원까지의 보상금 지급을 완료했다.

오늘날도 부동산 투기꾼이나 당시 정치꾼들이 하던 행위가 그때부터 이어오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음에 탄식이 저절로 나올 따름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자기 존재를 완전 잃어버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는 당시 주변에서는 자칫 간첩 등으로 몰려 잡혀가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과 출생년까지 바뀌어버리는 바람에 죽은듯이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은 시대적인 상황과 아버지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서 사시게 된 내용 부분을 글로 올려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8년 11월 8일

일본 동경 아다치구에서 이요한 (연락처 : 81-070-4413-4512 / 이메일 :  j39060091@gmail.com)

담당업무 : 문화·연예부
좌우명 :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뉴스... 그 속에 사는 '우리'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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