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日本 ⑧] 일본, 일본인…한국, 한국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책으로 보는 日本 ⑧] 일본, 일본인…한국, 한국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 이수진 교수
  • 승인 2018.08.0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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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즈 이수진 교수]

멀고도 가까운 나라. 부산에서는 제주도 보다 대마도가 가까운 일본.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일본대사관 건너편 단정한 한복을 입은 무표정한 얼굴의 단발머리 소녀를 두고 얼굴을 붉히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 일본에 대해 이수진 교수의 ‘책으로 보는 일본’을 꾸려봤다 <편집자 주>

조선일보 선우정 기자가 쓴 『일본, 일본인, 일본의 힘』(루비박스(2009))은 예전에 읽었던 『일본 재발견』(이우광 지음, 삼성경제연구소(2010)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한국만의 장점을 살려 일본을 넘어서자는 논지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불황일 때 일본 기업들의 대처 방법에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한국의 기업들이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다. 결국 경제를 살리고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는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의 개인들이 제 할 일을 열심히 하고 그에 따른 소득의 공정한 분배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데, 확실히 일본의 기업과 경영문화는 이런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저자는 위기 때마다 강해지는 일본이라 말하며 정작 한국 기술의 일본 종속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한국 기업에 원천기술이 없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게다가 소재나 부품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한국의 대기업은 일본이 없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 냉혹한 국제 경쟁 속에서 너무 안일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을 넘어서고 싶다면 기술 종속부터 극복해야 한다.

일본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의 일본 콤플렉스는 반드시 치유해야 하는 강박증에 가깝다. 일본으로부터 받았던 역사적 상처 외에도 도무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행태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증 양가성의 깊은 뿌리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일본은 한국이 따라잡아야만 하는 일종의 지상목표였고,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숨 가쁘게 일본을 추월하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진정 일본 극복을 이룩했는가? 우리의 정신 속에서 일본이라는 대상을 똑바로 인식하고는 있는 것인가? 도대체 과거 자신들의 행적을 반성은커녕 주기적으로 망언을 일삼는 일본의 정치인들과 우익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정교한 대항논리는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물론 길고도 지루한 싸움 속에서 현대와 삼성이 도요타와 소니를 추월한 것 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원천기술이 없는 상태에서는 단순 제조와 기획의 차이로 인해 역전은 순식간이다. 이제는 정말 일본을 극복하고 싶다. 다시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자. 

한국에서 끝없이 나오고 있는 일본론은 대부분 단순 인상기에 그치고 있는데 반해, 김진현 전 서울시립대 총장의 『일본친구들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한길사(2006))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적절한 분석과 비판적 시각이 결합된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이 책이 집필된 2006년이라는 시공간적 틀에서 일본에 관해 논할 수 있는 극한까지 밀고 가 그 근본적인 핵심을 빠짐없이 다루는 저자의 거시적 관점이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 정책적 지향점, 근본적인 모순,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결여된 과거사 문제, 야스쿠니,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던 경험이 왜 엇박자로 나아 갈 수밖에 없는지 등, 이 책을 읽고 나면 지리적으로는 가까우나 심정적으로는 멀 수밖에 없는 일본에 관해 저자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책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한국과 한국의 가능성에 마음이 약동할 것이다. 그 예언이 일부 적중한 것일까? 2013년 최초로 한국이 경상수지에서 흑자를 기록해 일본을 앞섰다고 했을 때 진정으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역사 인식, 그 중에서도 신사문제는 단골이다. 한국 뉴스에서 자주 접하는 일본 관련 풍경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에 공물을 봉납하고 국회의원들과 각료들이 집단으로 신사참배에 참석했다는 보도. 도대체 야스쿠니가 무엇이라고 일본은 이토록 집요하게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를 고집하고 있는가? 한국인은 야스쿠니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익이나 역사왜곡에 대한 반응과 마찬가지로 지적인 접근이 아닌 감정적 대응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때 필요한 책이 바로 다카하시 데쓰야 동경대학 교수의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현대송 옮김, 역사비평사(2005))다. 이 책은 지난 2013년에 한 번 읽었고, 그 뒤 미디어에서 야스쿠니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되풀이해서 읽어 왔다. 저자는 일본에서도 진보적으로 꼽히는 지식인으로 이 책을 읽어보면 대다수 일본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는 야스쿠니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야스쿠니는 “감정의 연금술에 의해 전사자의 비애를 행복으로 탈바꿈 시키는 장치이다. 전사자를 추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사를 현창(顯彰)하는 것이야말로 야스쿠니신사의 본질적인 역할이다.” 여기서 감정의 연금술이란 저자가 야스쿠니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개념으로써, 아시아 침략 전쟁으로 아들을 잃었다면 당연히 슬퍼해야 할 부모의 감정조차 국가가 나서서 성대한 의식을 치루고 나면 호국 영웅으로 받들어져서 큰 기쁨으로 여겨지는 상황으로 급변하는 것이 마치 연금술과 같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국가가 타국을 침략하기 위해 동원된 전쟁에서 전사한 뒤 호국영령으로 떠받들어져 야스쿠니에 모셔졌으니 오히려 국가와 천황의 은덕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발상에서 야스쿠니의 존속 의미가 정당화된다는 뜻이다. 즉, 야스쿠니는 패배한 전쟁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고 다음 전쟁과 전사자를 준비하기 위한 지극히 일본적인 피의 전당인 셈이다.
 
일본 내에서도 야스쿠니에 대한 관점이나 찬반론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야스쿠니가 추도와 위령시설로 이해되고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 또는 희생자들을 위한 종교시설이라고 주장해도, 그 희생자들이 국가가 벌인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원하지 않는 싸움을 하다가 죽은 것이라면 왜 A급 전범들과 조선인, 대만인까지 합사하였는가가 문제 된다. 정작 원자폭탄에 희생된 일본 민간인이나 오키나와에서 죽음을 강요당한 오키나와人들은 왜 합사하지 않았는가? 그들도 침략전쟁의 엄연한 희생자들이 아닌가? 아시아 각국에서 영미 연합군과 전투하다 그 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일본인 전사자들 모두가 야스쿠니에 모셔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A급 전범들을 가장 상석에 두고 나머지는 형식적으로 여기는 소수 우익의 사고 자체가 이미 군국주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자위대의 군대로의 격상과 집단 자위권의 확대 등으로 구체화 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야스쿠니는 언제든 일본인들을 재집결시켜 장차 일어날 수도 있는 전쟁을 정당화하고 국민들의 대량 희생을 강요하는 지극히 위험하고 왜곡된 역사관과 현실 정치의 후진성을 밑에 깔고 존속해 온 지극히 일본적인 정신의 딜레마일 뿐이다. 한국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일본을 이야기하면서 권하고 싶은 책은 『학문을 권함』(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이동주 옮김, 기파랑(2011))이다. 서양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동양의 국가로서 조선과 일본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서양 문물,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학습이다. 이 측면에서 학습의 전제가 되기도 하고 내용이 되는 학문에 방점이 찍혔다.

학문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필요한 것일까? 학문이 순수성을 유지하기란 지난(至難)한 것인가? 학문이 대중의 계몽이라는 목적성을 지향할 때 과연 객관적 시각을 고수할 수 있을까? 학문이 특정 이념을 고무하거나 정치 체제를 옹호하며 이웃 국가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때 그것을 학문의 본령(本領)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것들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학문을 권함』(원제 『學問のすすめ』)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며 쉬이 해답을 주지 않던 의문들이었다.

다 읽고 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정리가 되었다 싶어 이번에 정리한다. 먼저 저자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개화기의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써, 그의 10대는 도쿠가와 막부가 봉건체제를 유지하면서 쇄국을 단행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1853년 미국에 의한 강제 개항과 1867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근대화로 치닫게 되는데, 이후 일본과 관련 있는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과의 과학기술 및 학문적 격차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임을 자각하고 일본 대중의 계몽에 일생을 바친 대표적 근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과 삶의 자세에서 세상에 나오게 된 이 책은 저자가 고향인 오이타(大分) 현 나카스(中津)의 중학교 학생들에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들려주고자 쓰기 시작한 글로 17편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일반 대중들에게 까지 널리 읽히게 되었다고 한다.  

위에 소개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이 책을 읽어 나가면 한국인은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뒤 이은 고난의 세월에 이 책과 저자가 알게 모르게 기여한 사상적 연원에 분노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 후쿠자와는 정한론(征韓論)과 탈아론(脫亞論)으로 일본이 제국주의로 들어서는데 일정 정도 기여한 부분도 있다. 정작 문제는 어떤 책과 그 속에 내재된 사상을 통해 계몽된 민중이 주체적인 자각 없이 시대적 분위기와 내부적 갈등의 요소를 해결하고자 외부로 눈을 돌려 침략과 전쟁에 내몰리게 된 상황 인식의 결여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학문과 사상은 그 자체로 근대 일본 지식인의 시야의 한계와 시대적 요청에 답하는 수신서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다.

서양보다 모든 면에서 낙후된 일본의 사정을 똑바로 인식하고 서양을 적극적으로 배워 언젠가는 그들을 넘어서자는 주장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서양으로부터 배운 제국주의적 심성까지 일본화 하여 조선과 아시아 각국을 침탈하고 잔혹하게 지배하며 학살을 자행했던 그들의 과거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한국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만의 논리일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위에서 던졌던 몇 개의 질문들은 과연 학문의 본령과 순수성이 여하히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학문을 권함』이라는 책은 오직 일본인에게만 유효한 영속성을 갖는다.

또한 현대 일본인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 일본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역사의 맹목적 반복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못된 친구에게도 배울 점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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