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 "진짜 이산가족은 탈북민들...북녘 사람들은 왜 생이별 해야 하는가?"
마순희, "진짜 이산가족은 탈북민들...북녘 사람들은 왜 생이별 해야 하는가?"
  • 신상인 기자
  • 승인 2018.06.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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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찾으러 중국 갔다가 한국 정착...탈북민이 보는 남북관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이산가족에도 들지 못하는 또 다른 이산가족..."통일을 기대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크다"

[데일리즈 신상인 기자]

남북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같은 일들이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깜짝 만남이 시작이었다.

6ㆍ25전쟁의 총성은 휴전 상태로 멎었지만 전세계 유일하게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나뉘고, 틈만 나면 서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은 '4ㆍ27 판문점 선언' 이후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시화될 듯 보이다 중국의 훼방이라는 미국의 투정으로 흔들렸다.

왜 우리가 평화를 말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말하는 와중에 미국과 중국의 간섭 아닌 간섭을 받아야 하는 지는 역사적인 사실과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으로 이야기하기에 너무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남북이 엄중한 이 즈음에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으로 정착한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과연 그들은 어떤 눈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지난 1998년 중국으로 건너가 2003년 다시 남한으로 정착한 마순희 씨를 만났다. 지난 5일 양천구 한 교회 1층 커피숍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내용이다.

마순희 前 남북하나재단 전문상담사의 북녘 고향 이야기와 탈북생활 기록

탈북민 마순희 씨가 그의 탈북 생활과 남한 정착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데일리즈
탈북민 마순희 씨가 그의 탈북 생활과 남한 정착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마순희 씨 제공) ⓒ데일리즈

- 남북관계 개선 시점에서 탈북민으로서 보는 기대시항이 많을 텐데…

"저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내 나이가 68세이니 언니, 오빠가 다 북한에 살아 계신데 얼굴도 못보고 돌아가시는 거 아닌가 싶어 조급해져요. 북한도 엄청 통일을 외치거든요. 남한에 오니까 남한도 엄청나게 통일을 외치더라. 서로 외치면서 남과 북이 통일하는 것을 어떤 관계들 때문에 미국과 중국이 반대한다는 것으로 들었다."

"자기들이 뭔데….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한번밖에 못사는 인생인데 어떻게 '사람을 갈라놓고, 서로 못 보게 할 수 있나'하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같은 경우는 도망치다시피 (북한을) 나왔지만 그래도 식구들과 행복하게 만나서 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위정자들이 너무 미운 거다. 정치는 위정자들이 하고 백성들은 그냥 백성들이 생각하는 일이나 하면서 살면 되잖아요. 봉건사회나 노예사회나 위정자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민초'였잖아요.  각자 자기들이 알아서 자기 일하고 우리는 그냥 편하게 일만 하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러다가 식구들도 못 보고 가는 거 아닌가 싶다."

"보수든 진보든 누구든지 통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런 사람을 지지해서라도 꼭 통일을 하고 싶다 그런 거다.  어느 날 이렇게(4 ㆍ 27 남북 정상회담) 되고 나니까 가슴이 콩닥콩닥거린다. 우리는 탈북자들이니까 보수 쪽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문자들이 많이 오잖아요. 하지만 반대하는 글도 엄청 많아요."

"예전에도 그랬지만, 아침에 뉴스 먼저 틀어요. 밤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어떻게 두 대통령이 손잡고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다는 게 상상이나 했겠어요? 개인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기대가 된다. 물론 힘들거란 생각은 해요. 밀고 당기기도 있을 거고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길거고…. 하지만 우리 나이 대들은 거의 비슷해요. 젊은 애들 말을 들어보면 속지 말라고, 핵을 포기하냐고, 죽어도 안 변한다고 해요. 그런데 살아보니 죽어도 안 변하는 게 어디 있어요?"

-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나라 대 나라가 되면 어느 정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겠어요

"우리는 지금 북한에 돈을 보내면 30~40%가 떼고 보내져요. 한 절반도 못 갈 거예요. 그래도 지금 돈을 보내주고 있거든요. 그렇게 안되고 10~20% 국가가 받더라도 공공적인 어떤 라인이 있다거나 하는, 결국 안전하게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기대가 되고 환영해요."

- 반대로 우려와 걱정은 없나?

"남한 내부가 문제일 수 있다. 워낙 한국은 남남 갈등이 심하지만, 북한은 아니다. 유일적 지도체제로 정리된다. 중대장이 '노루를 보고 사슴이다' 그러면 노루도 사슴이 되는 거에요."

"특히 한국사회 내부에서도 어느 쪽으로든지 서로를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그냥 '내 식구 먹여 살리면 되지, 뭔 상관이냐'고 해요."

- 민족 통일 관점에서 북미관계와 주변국에 대한 느낌은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주변 강국들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나라인데 왜 우리끼리 잘 하면 되는 거지,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할 일을 못 해야 하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되거든요."

"제가 배울 때는 통일은 쉽게 안 된다. 남북한만이 합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지금 생각에는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전세계가 바라고,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가가 통일을 한다고 하면 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할 거라 본다. 뒤로는 어떤 조건을 내세우더라도 세계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할 거 같아요. 대국으로서 명분도 없고 한 마디로 면이 안 서잖아요."

앞서 자기 소개를 먼저 한 마순희 씨였지만 편집상 6ㆍ12 북미 정상회담 등 남북을 중심으로 한 관계 개선과 국제 관계를 보는 시각을 먼저 소개했다.

- 자신을 소개(고향, 북한 직업, 탈북 계기 등) 해준다면…

"제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입니다. 탈북은 1998년 6월 큰딸이 배급도 못 받고, 노임도 못 받고 하니까 일주일 휴가를 내 돈 벌어오겠다며 중국엘 갔습니다. 누가 꼬시니까, 중국에서 돈 벌어 오면 북한에서 작은 가게라도 차려 식구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계획을 세운 거죠. 그때 큰 딸아이가 돈 번다고 따라갔다가 처음 자본주의를 본거지요."

"두만강과 신작로, 철길을 건너면 중국마을이 있어요, 시내에서 물건들을 사가지고 농촌마을에 맡겨놓고 그걸 받아서 걸어서 오가다 보면 밤까지 걸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때 중국 쪽은 네온등이 번쩍번쩍하고 북한 쪽은 등잔불로 깜깜하고… 극과 극이지요. 북한이란 사회는 감시와 밀정이 많아서 그 전에는 두만강 건너 중국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녔어요. 중국 쪽 화려한 불빛이나 그쪽 사람들이 나와서 노는 모습을 보면 그쪽을 동경한다고 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사적여관에서 일했어요. 김 씨 일가가 현지지도하면 사적지가 되고 하루를 묵어가면 사적 여관이라는 게 되는 거예요. 사적여관에서 취사원으로 일하기 전에는 무산광산 정양소라는 곳에서 옥수수로 국수 만들며 12년을 있었어요. 근데 그 곳은 잡곡이 많아 배급이 잘 안 될 때가 많아 잡곡을 가루내서 국수를 만들어 먹는다. 그러다 탈북 3~4개월 전에 사적여관에 다녔다."

북한에서는 휴가기간 이용하는 '휴양소'와 일하면서 숙식을 제공받는 '정양소'를 이용할 수 있다. 정양소는 몸이 약한 노약자나 혁신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일반 배급소의 7:3 혼합이 아닌 백미 100%와 일부 육류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

"맏딸은 광산에 다녔고, 둘째딸은 무산광산 선전대에 다녔고, 막내가 졸업해서 광산 선전대에 다니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고향에선 광산에 제일 큰 기업이에요. 국수를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처럼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다 중국에 돈 번다고 간 맏딸을 찾으러 가는 길이 고향과 이별하는 길이 됐어요."

"맏딸 입장에서는 북한 직장에 나가도 하루 종일 옥수수 국수 요~만큼 먹고 하루 종일, 거의 10시간 곡괭이질하고 삽질하면서 힘들게 일해야 되는데 중국은 고기국을 먹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그런걸 보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 거에요. 그런 맏딸이 '내가 돌아갈 맘이 없다. 자식 하나 죽은 셈치고 기다려 주면 좋은 사람 만나 시집을 가든 중국에서 돈을 벌든 해가지고 집을 도와 주겠다'는 편지를 써 보낸 거에요."

"편지를 받아 들고는 어떻게 망설일 여유도 없었어요. 찾으러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여기서는 인신매매라고 하고 거기서는 브로커인 삼촌이 있었어요. 그때는 삼촌이 그런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근데 그 사람이 애를 데려 갔다가 애는 버리고 편지만 가져오길래 '애는 어디 있냐' 그랬더니 '두만강 넘어 길진이라는 마을에 있다'고 그래요. 강만 건너가면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럼 '우릴 거기 데려다 줄 수 있냐'며 이야기가 시작된 거죠."

"난 목적이 딸만 만나면 되겠다 싶었어요. 삼촌이 큰딸을 데려다 주고 중국 돈으로 1000원정도 받았나 봐요. 1000원이라는 돈은 북한에서 일년을 일해도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란 말이에요. 큰돈이에요. 그 사람도 와이프가 중국 쪽으로 가서 오지 않기 때문에 와이프 찾으러 중국에 왔다 갔다 하다가 그 일을 한 모양이더라구요."

"이런 걸 알게 되니까 처자 하나만 넘겨다 주면 자기가 먹고 살수 있는 길이 열리니까 그런 길로 들어섰나 봐요. 큰딸 하나 데려가면 내가 딸 셋 데리고 사니까 무조건 따라서 건너갈 것이다라는 타산을 했겠지요. 데려다 준대요. 그래서 그날 밤으로 짐 정리를 하고 무조건 애를 데리러 가겠다고 했고, 다른 애들도 같이 가겠다 하는 거예요."

"딸을 찾으면 같이 돌아오고 딸을 못 찾으면 거기서 딸을 찾을 때까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가족이 갈라져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지요. '탈북 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때 당시 못했어요."

"그날 밤으로 짐을 다 정리하고 초상화(김일성 ㆍ 김정일) 액자를 두 개를 다 닦아놓고, 초상 휘장(김일성 ㆍ 김정일 배지)을 제일 좋은 옷에 달아놨어요. 가다가 잘못돼서 잡히더라도 이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던 사람인데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구나 생각하게 하게끔 편지를 써놓고 나섰어요."

마순희 씨. ⓒ데일리즈
마순희 씨. ⓒ데일리즈

"사회주의는 내가 없어도 지켜 지겠지만, 내 딸은 내가 안 찾으면 누가 찿겠는가. 내 자식 찾으러 가야 되겠다. 써놓고…."

- 20년이 흘렀네요. 1998년 6월 25일이면 여름인데 나서는 길이 쉽지 않았겠습니다

"1998년 6월 25일 전쟁기념 행사를 한다고 다 (읍내로) 내려가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까봐 딸 둘이 먼저 가고 갈라져서 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지긋지긋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었나 봐요."

"딸을 찾는다는 것도 목적이고, 자고 깨어나면 누구네가 누가 죽었다, 누구네 집이 다 도망쳤다는 그런 뒤숭숭한 그런 판국 이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보다는 먹는 부분에서 일했기에 좀 낫다 하지만 항상 불안하잖아요. 내일이 불안하고, 하루 먹으면 다음날 먹을 걸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6월 25일에 중국으로 건너오니깐, 우리 식구가 와서 딸이 있으면 데려갈 것을 아니까 이미 빼돌리고 나머지 작은딸과 같이 3일동안 농가 지붕 위에 있었어요. 농가 양철지붕 위에 삼각형으로 지붕 밑에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들이 사람을 팔아 넘기려고 장소를 만들어 놓았더라구요."

"추운 지방이니까 지붕 밑에 겨를 겹으로 깔고 비닐과 담요를 다 깔아놓고 천장에 공기구멍처럼 구멍이 있어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사다리만 치우고 입구만 닫으면 면 밖에서는 모르는 구조예요."

"3일 후 우리를 빼돌려야 되는데 변방대 순찰차(공안)이 30분에 한 대씩 다니니 조심스러워 해요. 공안들이 길가에 있는 사람들 다 잡아서 단속을 해서 순찰을 하니까 숨게 됐다. 거기 있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거쳐갔구나 생각했지요. 그 위에 머리핀이며 리본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으니까요. 그 사람들은 그걸 아무러치도 않게 생각해요. 남한 소설 책이 쌓여 있으니 불 켜고 계속 소설책만 봐요.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다 연길 시내로 가야 하는데 화룡현을 거쳐 연길로 빠지는 외통길에 초소가 있어서 그 초소를 에둘러 산을 몇 개나 넘으면서 가야 했어요. 브로커 집에는 시집가서 연길에 사는 누이동생 남편이 택시운전을 해요. 북한 여자를 데려왔다 연락이 가면 현대판 노예처럼 사람을 앉혀놓고 가격을 매겨요. 중국말은 잘 몰라도 그런 모양새다 싶었어요."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도록 북한과 멀리 떨어지려고 안내를 하는 브러커 친척이 있는 흑룡강성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그곳과 연결된 곳으로 데려가요. 데려간 여자의 남편이 중국 공안이라 미리 정보를 줘서 대비하기도 했다. 북한 사람들이 잡히기만 하면 벌금을 내야 하니까… 중국에서도 힘 있는 사람들이 그런 브로커로 돈을 벌어요."

"애들이랑 만나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 다 만나 지더라고요. 큰딸이 가족을 살리겠다고 간 거잖아요. 큰딸이 도망쳐서 운 좋게 나를 만났고 나머지 두 딸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돼 그 곳에서 모두 만나 한 2년반 살았어요. 한국에 올 때는 세 딸하고 같이 왔어요. 사실 중국 공안이 계속 잡아가지만 않으면 여기 오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될 거라 생각해요."

"중국에서 지낸 생활이 맘이 편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사는 것 보다 맘 편하게 살았지요. 땅이 넓어가지고 농사만 지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어요. 맘만 먹으면 고향에 갈수도 있는 거고…."

"한국처럼 이렇게 각박하게 살지는 않지요. 북한에서 계속 탈북자들을 넘겨달라고 하고 공안단속이 심하고, 그러니까 불안한 마음이 가장 큰 거고…."

"북한에서도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살았지요. 하지만, 살기는 바빴으니까(힘들다는 뜻)…. 그 땅에서 잘 살았으면 그 땅에서 살면서 딸이 오기를 기다리지 뭐하러 오겠어요."

마순희 씨와 세 딸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안에 신고되지 않아 북송되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불안감에 영사관 철문을 넘어 망명하는 뉴스를 보고, 영사관이 있는 북경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외로움을 이기려고 산에 간다 "산 속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또 같다"

마순희 씨가 말하는 남한 정착의 가장 큰 힘든 문제는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데일리즈
마순희 씨는 남한 정착의 가장 큰 힘든 문제가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데일리즈

- 북한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나 북한 역시 사람 사는 곳으로서 기억에 남는 일화

"거기도 사람이 사는 데니까. 사람 사는 정 같은 것도 당연하지요 그런 거는 있기 때문에 저는 북한에 대해서 말할 때 다 나쁘다고는 안 해요."

"북한에서는 집단주의체제로 살았잖아요. 사회주의 제도가 다 무너져서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살기가 괜찮았어요. 직장을 계속 옮겨 다니는 것보다 한 곳에 계속 다니다 보면 가족보다 더 가까워요, 공동체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까 한 식구나 다름없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가 구호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누가 어렵다고 그러면 다 같이 모여서라도 도와주고, 집단 속에 개인의 몫이 있다. 이런 마인드로 살다 보니까 그 집단생활은 나름대로 살기 좋았는데 거기에 너무 계급적으로 나누어 차별을 받고 이러니까 힘든 거지요. 한국처럼 자유가 많지는 않지만, 이웃간에 정도 많고 그런 생활은 추억도 많고 좋은 기억도 많아요."

- 공동체적인 생활과 남한 생활의 차이는?

"자기 밖에 모르잖아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잖아요. 그게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더라구요. 어떤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 찬양 받아야 될 일이면 다 같이 축하하고…. 만일 그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겼다거나 탈북자가 생겼다고 하면 본의 아니게 여론이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거예요."

"개인주의 사회하고 집단주의 사회라는 게 그런 점에서 다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쩌면 여론이 여러 명 사람을 죽여요. 나머지 인근 가족도 불이익을 받으니 그런 거에요. 조심스럽죠, 친하다고 생각하고 다섯~여섯명 모였을 때 얘기를 하면 그 중 누군지 모르는데 그 말이 딱 조직에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럼 죄송하다, 잘못했다고 비판서를 쓰지만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누가 말했을까'라며 서로가 경계하고 감시를 하는 게 그 체제의 성격이지요."

'여론'이라 함은 일종의 소문으로 북한 사회 내 사로청(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보위부, 안전부, 인민반, 직장 등에서 서로 감시하는 형태를 말한다.

"충성이라는게 상하관계는 있지만 수평관계에서는 못하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통제방법인거죠. 그 사람들은 수직으로는 충성하게 하고 모든 일을 보고하게 하지만 수평적으로 다시 말하면 노동자들끼리 단결하고 우리끼리 연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고 경계하도록 만드는 거죠. 단합해서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반대할 때는 어려운 일을 만들기 때문인 거예요."

- 그런 생활하다가 남한에서 가장 힘든 점은?

"'외로움'이죠. 딸 셋이 같이 있으니까 외롭다고하면 그렇지만, 탈북 전날까지 직장생활을 했으니까 직장생활에서 떨어져 혼자 고립된 거 같았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 수 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내가 소통하고 얘기할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러니 유일한 돌파구가 가정밖에 없는데 가정도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그런 외로움은 집단에서 분리돼 소속감이 없는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럴 때마다 산속에 들어가면 안정감이 생기고 푸근함이 너무 편안해요. 번화한 한국사회를 벗어나 산속에 가면 북한 산속이나 남한 산속이나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되요. 내가 살던 환경이 그대로라고 느껴져요."

"애들하고 나하고 정착하는 속도가 달라요. 애들은 빨리 배우더라구요. 거기다가 엄마로서는 남편이 있으면서 남자친구(동료)나 직장사람과 어울리면서 늦게 늘어오면 어떡하냐, 치마가 짧다, 화장이 진하다고 자꾸 잔소리 하다 보니 애들하고 점차 멀어지더라고요. 소통이 안되고… 이제는 시간이 흘러 서로가 이해하다 보니 많이 나아졌어요."

"그러다 1~2주에 한번 모이면서 나아지고 있다. 남한 사람들처럼 자주 하는 외식은 소통에 도움이 별로 안 되요. 우리는 집에서 음식 만들면서, 차려 먹으면서 소통이 되지요."

- 그러면 남한과 달리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딸들과 갈등이 없었는지?

"그쪽에서는 내 위주로 돌아갔잖아요. 엄마 말이면 무조건 듣고 그랬는데…. 중국에서 각자가 다 따로따로 살면서 전화통화만 가끔하고 각자 사니까 몰랐어요. 내가 엄마로서 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북한에서는 노동자 주택에서 살았지만, 중국에서는 세 딸 집에 돌아다니면서 사니까, 내 집도 없었어요. 농촌마을에 쓰러지는 초가집일망정 혼자 사는 할머니들도 얼마나 부러웠는지…."

"한국에서는 임대주택이지만 내 집이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어요. 처음 하나원에서 나온 날 여러 가지로 많이 피곤해도 잠도 못잤어요. 쓸고 닦고, 또 쓸고 닦고, 내 집이라고 하니 집이 너무 좋아서요."

- 2003년부터 15년정도 남한 정착생활이 지났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나

"그렇지요. 지금은 내가 일도 하고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했어도 하는 일이 많아요 (남북하나)재단에서 탈북민 사례 심사위원으로 회의에도 참가하고 재단에서 출판하는 '동포사랑'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해요. 남한에서 잘 정착하는 탈북민들의 사례를 발굴하고 취재하는 '착한사례'의 취재기자로 수 많은 탈북민들을 찾아가서 만나기도 하죠.”

"오늘도 딸이 햇감자를 사왔는데 주변사람들과 감자전 해먹으며 즐거운 시간도 보냈구요. 이전 회사 동료들이나 교회친구들과도 모여 놀기도 하고, 한국사람들과도 잘 지내고는 있지만 아직 한국사람과 만나 놀음판을 벌이지는 않아요. 아직도 북한 사람들과 만나는 게 더 편하고 좋아요. 그렇지만 참여하는 단체가 몇 개 되는데 거기서도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다만 아직도 편하고 익숙하지가 않아요. ㅎㅎ"

- 교회는 남한에서 다니게 됐나요?

"북한은 교회가 없었다. 근데 중국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만 다니더라구요. 농촌 같은 데서는 농사지으며 잘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집안이 어렵거나, 장애인이 있거나, 어려운 사람들만 다니더라구요. 일요일이면 초가집 같은 데서 모여서 기도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한다구요. 하루만 풀을 안 뽑으면 안 되는데 저리 노래하고 손뼉 칠 시간에 풀 한 포기 더 뽑겠다며 그러는 거지요. 그러니까 초가집에 맨날 빚지고 살지. 이런단 말이에요."

"우리동네 사람들은 다 못사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거 같았어요. 그러면서도 궁금하긴 했는데 (북경 주재) 한국영사관에 들어가야 하는데 급하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구요.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도 모르면서 '하느님이 불쌍한 어린양들을 대한민국까지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눈물로 기도했어요. 그 절박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어쩌다 보니 그날 낮에 몸 싸움 하면서 무사히 영사관에 들어왔어요."

지난 2003년 마순희 씨와 세 딸들은 4년반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주중 한국영사관으로 뛰어들며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 남북하나재단 전문상담사로 한 일들은…

"지금은 재단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서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는 성공사례를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탈북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사회통합을 도와주고 있는 거죠."

"남북하나재단이라는 게 북한 이탈주민 지원재단의 별칭이다. 남북하나재단은 탈북민들의 우리사회 정착을 돕는 통일부 산하의 공공기관이에요. 재단은 한국에 온 탈북민들의 초기정착에서부터 생활안정지원, 취업지원사업, 교육지원, 인재양성사업, 그리고 국민인식개선사업까지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저는 2011년 4월 재단에 공채로 입사했는데 61세 때니까 다른 사람들 퇴직할 나이거든요. 다행히 2007년부터 탈북민들을 도와 주는 한 민간단체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상담을 하다보니 그 경력이 도움이 되었나 봐요."

탈북민들의 성공은 한국사회에서 '걸림돌이 되지 말자'가 기준

- 탈북민이 3만 명에 육박한다고 들었다. 굉장히 많은데, 정착 성공률은 어느 정도로 보나

"성공에 대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성공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어요. 회사생활을 몇 년 이상 계속했다던가, 창업을 한 사람들도 몇 년 이상 계속 사업을 하고 있다던가, 청년들 같은 경우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든가, 정상적으로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한 사람들, 사람들마다 기준이 틀리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 한국사회에 짐이 안 될 정도로 자립, 사회통합이 돼서 소통이 잘 되는지 남들이 봤을 때 '아,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네', '저 사람 성공했네' 하는 사람들만 인터뷰를 했어요."

"성공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것은 아니죠. 평가자들이 볼 때 취업이나 창업을 했다가도 오래 유지하지 못 하고 폐업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성공률을 정하기가 애매해요. 처음에 발굴할 때는 먼저 취재했던 사람이 추천하거나, 상담사들이 추천, 민간단체들에 부탁해서 소개해 주는 사람들의 사례를 다 들어보고 1차 발굴 취재를 한다. 그리고 심사를 통해 '착한사례'로 선정하고 그 중에서 해마다  30~40개 사례를 추려 착한사례집 <공감>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있어요."

-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세습과 당시 북한에서 느낀 점은

"김일성 – 김정일 대를 겪었어요. 큰 차이를 못 느꼈어요. 경제적으로는 김일성 때 편안했어요. 그 다음엔 '고난의 시기'에 나라가 다 어려워 졌을 때 김정일이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제국주의자들의 경제봉쇄로 허리띠를 졸라 메면서 고난을 해쳐 나가야 된다고만 했으니까 힘들었죠."

"그 때는 어려워도 참고 살다가 (김정일 때) 어쩔 수 없이 눈물로 떠났지요.  내 식구가 없어 지니까 일단 정치를 떠나서 가족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탈북을 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거는 뉴스로 보고 알았어요. 김정일 때 많이 선전을 했다는데, 뚜렷하게 기억이 안나요. 사는 게 바빠서 그런지 나중에야 알게 됐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판문점에서 만나고 남북 기류가 좋아지는 것처럼 남한 소식을 얼만큼 들었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마순희 씨의 대답이다. 

"김정은 때는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기존 세대와는 다르게 새로운 시도를 한 거라고 본다. 자기 세력을 구축하고 자기 의사를 관철하는 방법을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봐요."

아직은 반 쪽짜리 행복과 웃음…북녘의 반쪽을 가져오는 통일이 필요

탈북민들에게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는 마순희 씨. ⓒ데일리즈
탈북민들에게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는 마순희 씨. (마순희 씨 제공) ⓒ데일리즈

- 당장이 아니더라도 남북이 통일이 된다거나 교류가 원할해지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통일되면 우리 딸들하고 다같이 가서 거기 남아있는 식구들 많은 사람들한테 모든 걸 다 나눠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내 나이가 60이 돼서도 사이버로 사회복지, 법률 공부도 많이 했어요. 상담사 일을 하면서 배워야 할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받았고 법원의 시민사법위원으로도 활동 하고 있고, 목동야구장에서 유명인사들만 한다는 시구도 했어요. ㅎㅎ"

"대학에서 사회복지 공부할 때도 노인 복지에 관심이 많았는데 북한에서도 어르신들이 제일 불쌍하거든요. 애들은 나라의 왕이라고 나라에서라도 돌봐주고 어른은 못 먹더라도 애들은 먹이거든요. 젊은이들은 직장에 나가서 일하기 때문에 나가면  집에 계신 늙은이들은 오갈 데 없이 제일 불쌍하거든요. 제일 많이 고생한 노인들을 위해, 한국에서처럼 내 고향 무산에서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짓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 우리 오빠, 언니들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 북한 노인들은 노동에 대한 나이 제한 있나요?

"그쵸. '연로보장'이 있어서 남자는 60세, 여자는 55세가 되면 일을 안 해도 된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 땔감도 해야 하고 '소토지'라도 해서 식구들을 먹여야 되니까 산을 개간해서 감자, 콩, 옥수수를 경작해서 배급이 안 되는 부족한 생활을 버텨야 해요."

"빨리 언니, 오빠들 살아계실 때 있는 돈 다 보내고 싶어요. 지금은 저도 어렵게 모은 돈이기는 하지만 100만 원이라도 보내면 한국에서 오는 돈은 무조건 30% 떼어야 한다고 그러죠. 남조선에서 오는 돈은 무조건 수수료를 뺀다고 그러면서 또 이중으로 빼는 거지요. 50% 정도밖에 못 받아요.”

"당국이 모르게 하는 거라 뭐라 할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보내는데 거기다 또 거짓말로 확인시킨단 말이에요. 다 받았다고 대답을 하게 하고…. 그럼 왜 못 받았다고 얘기하지 못했나 그러면 미안하다고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거라도 받아야 살겠기에 그러는 거래요. 여기서도 힘들게 벌지만 거기선 그거라도 큰돈이니까 보내게 되죠."

"한국 돈 100만 원이면 엄청 큰 돈이지요. 몇 달은 살 수 있대요. 탈북자들이 엄청 많이들 보내요, 북한의 '지하 경제'라고 말을 할 정도에요. 옛날에는 김일성-김정일의 '백두산 줄기'가 제일이었지만 지금은 남한에서 보내는 돈, 탈북민들의 돈이 도움이 되니까 탈북자 가족이 있으면 '한라산 줄기'가 제일이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해요. ㅎㅎ 보위부 사람들도 현행으로 잡히지 않으면 웬만하면 눈감아 준데요."

중국에서 일명 브로커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남한 사회에서 일했던 조선족들이나 탈북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탈북민들에게 연락하고, 중간에서 한국의 은행통장을 이용해 송금을 도와주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일을 한다. 이들은 한국에서 브로커들을 통할때 기본 수수료 30%를 떼고, 다시 북한에 보낼때 또 50%를 떼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을 신흥 부자로 인식하는 면도 있다고 한다. 

"빨리 통일 되야 하는데… 아무리 행복해도 우리의 행복은 반 쪽짜리 거든요. 항상 그 곳 생각을 하고 있으면 무조건 마음이 아파요. 더울 때는 에어컨을 켜고 시원히 지내다가도 이리 더운데 밖에서 김 매고 있겠다 싶고, 비가 와도 걱정, 눈이 와도 걱정,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땔감도 없이 그 추운데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걱정만 앞서요."

"작년에 오빠네 집은 비가 많이 오면서 집이 떠내려 가서 다시 지었다고 하더라구요.  어제도 지인이랑 밥을 먹고 있는데 지인 고모가 사망하셨다고 전화가 왔어요. 내 잘못이 아니면서도 괜히 식구들에게 죄송한 생각도 들고…"

마순희 씨는 그런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찿아 가지도 못하는 탈북민들의 아픔을 대신 전하면서 마무리 했다.

※ 마순희 씨는 앞서 인터뷰 내용처럼 1998년 6월 중국을 거쳐 2002년 세 딸과 함께 주중 한국대사관으로 뛰어들어 2003년 1월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마 씨의 딸 중 둘째는 탈북 가수와 안보 강사로 잘 알려진 한옥정 씨다. 큰 딸은 현재 미디어 관련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막내딸은 사회복지사로 근무하고 있다.

마 씨 역시 초기정착과정을 거쳐서 2007년 8월 '새롭고 하나된 조국을 위한 모임'에서 운영하는 국립의료원의 북한 이탈주민 상담실에서 상담사로 남한 정착하는 탈북민들의 길잡이 역할을 시작했다.

이후 탈북민 전문상담사로 진심과 정성 말고도 전문적인 지식을 위해 세종사이버대학교에 입학, 대학졸업을 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 심리상담 자격증 등을 취득하면서 남 다른 노력을 이어갔다.

2011년 4월 남북하나재단에 공채로 입사했다. 그 곳 종합상담센터에서 북한이탈주민전문상담사로 근무했다. 재단에서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정착과정에서 겪는 일상적인 상담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상담까지 많은 상담을 진행한 공로로 2015년 남북 어울림한마당을 통해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했다.

2011년부터는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 '찾아가는 종합상담소'에 고정 패널로 참여해 탈북민들이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구체적인 상담사례를 통해 알리는 일도 했다. 지난 1월부터는 자유아시아방송 '마순희의 성공시대'로 매주 청취자들을 만나고 있다.

현재 남북하나재단에서 정년퇴직까지 했지만 '동포사랑'이라는 지면을 통해 탈북자들의 '착한사례'를 소개하는 사업에도 동참하고 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서울남부법원의 시민사법위원으로 초빙돼 북한이탈주민들의 법률적인 고충을 해결하는데 가교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매월 하나센터에서 '선배특강' 강의를 통해 남한 정착의 첫 걸음을 떼는 탈북민들에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는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담당업무 : 경제·산업부
좌우명 : 사실(Fact)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 '이유', 제대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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